[한경 데스크] '원위치' 또 '원위치' .. 임혁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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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경험한 갖가지 얼차려중에서도 특히 괴로웠던게 '원 위치'였다.
일껏 땅을 파놓고 나면 다시 묻게 한다든지,숨이 턱에 닿게 연병장에 집합하고 나면 다시 '내무반으로 원 위치' 하는 식이다.
이 얼차려가 특히 괴로운 것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문'까지 따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도로(徒勞)'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땅을 파고 연병장을 뺑뺑이 돌 때면,의식의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시지프스의 고역'까지도 떠올렸었다.
그런데 최근엔 군대에서의 이 '원 위치' 경험이 한국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진담은 아니고 하도 원 위치 되는 현안들이 많기에 해 보는,어깃장 섞인 얘기다.
비근한 예가 신용카드사들에 대한 규제다.
정부는 가계의 신용위기를 예방한답시고 작년 7월부터 카드사들의 대출영업 비중을 규제하고 연체율을 낮추도록 우악스럽게 압박을 가했다.
당시 한경을 비롯한 많은 언론들은 "신용공급을 급격히 줄이면 오히려 가계부실을 가속화하고 내수침체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지적에 아랑곳 않고 밀어붙이더니 결국 1년여 만에야 현실을 인정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동안 연체율을 억지로라도 낮추기 위해 채권을 헐값에 팔아치워야 했던 카드사들로서는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의 지평을 좀더 넓혀 보면 요즘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재벌기업에 대한 출자규제 문제도 '원 위치'의 대표적 사례였다.
외환위기 수습과정에서 정부는 투자부진의 원인이 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다는 재계의 지적을 수용해 이 규제를 풀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정거래위원회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이렇다 할 배경설명도 없이 1년여만에 다시 부활시켰다.
당시 한 경제평론가는 '정신분열적 행정'이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했지만 공정위의 고집은 아직도 꺾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난 DJ정부땐 '저래도 되나' 싶게 건설경기 부양책을 쏟아내 투기꾼들이 활개칠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더니 이번엔 집값을 잡는다고 사흘이 멀다 하고 투기억제책을 내놓고 있다.
프리드먼이 얘기한 '샤워실의 바보'들이 따로 없다.
물이 미지근하다고 뜨거운 물을 냅다 틀었다가 이번엔 너무 뜨거워지니까 황급히 찬물로 돌리는 식의 시행착오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근자에 경험한 '원 위치'의 예는 위도 원전폐기물 처리장,경인운하,새만금사업,판교신도시 교육단지 등등 헤아리자면 숨이 차다.
물론 이들 개별 현안이 원 위치된 것이 모두 정부의 책임은 아니다.
또 뒤늦게나마 원 위치시키는 것이 옳은 결정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개인이나 기업들이 입는 손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까.
가장 혐의가 가는 부분은 '공무원들의 강심장'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정책적 결정들을 그저 당장의 성과만 의식해 용감무쌍하게 내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근자에 만난 한 기업인은 이를 두고 "사회과학에서는 실험이 불가능하다지만 한국은 예외다.
한국의 정책 당국자들은 경제를 놓고 원 없이 실험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비꼬기도 했다.
이제 과천 나으리들에게 딱 하나만 부탁하자.정책 결정을 내릴 때 '실험 정신'은 제발 버려 달라고.시행착오를 지켜보기가 지겨워서기도 하지만 이러다가는 우리 경제가 왕복 달리기만 하다가 체력이 소진될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limhyu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