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가 귀국한 후 그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착잡함을 넘어 측은한 느낌마저 지울수 없다. 학자라면 나름대로의 소신과 고집을 갖고 자신의 이론 전파를 위해 말과 글을 통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고집이고 자존심이며 선대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딸깍발이 정신'일 터이다. 특히 송 교수의 경우 '경계인'을 자처하면서 북한을 '내재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운 이래 적잖은 진보주의 성향의 북한학자들이 그의 접근방식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마치 북한의 주체사상을 처음 접한 한국의 진보주의 지식인들이 주체사상은 기존의 해묵은 서구 공산주의사상과 다른 것이라며 반겼던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재적 접근법'이란 북한을 북한사람들의 눈으로 봐야지 제3자인 국외자의 입장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론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동안 서구에서 파생된 서구 위주의 이론들이 보편적 패러다임으로 다가오면서 비서구 세계에서 중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제도와 문화 및 가치규범들을 경시하거나 간과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서구적 편향에 대한 비판과 극복 방안으로 '문명충돌론'도 나왔고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조명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내재론의 정당성을 확립하는데는 지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건전한 상식을 통해 알고 있는 현실과 너무나 괴리가 있는 '초현실적' 결론이 나올 경우 직면할 수밖에 없는 황당함의 문제를 피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현실과 전적으로 다른 사실을 궤변적 논리로 강변해온 고대 소피스트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북한처럼 죽음의 수용소를 버젓이 운영하고 있는 최악의 인권침해국을 놓고 사회주의 이상을 위해 진력하는 나라로 묘사하는 등 북한의 눈, 특히 '북한 통치자들의 눈'으로 봐야한다는 것은 종살이를 하고 있는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을 노예주의 관점에서 봐야한다는 논리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바로 그것이 '비판사회학'이 요청되는 소이이고 또한 '비판적 이성'이 요구되는 이유일 터이다. 이점에서 송 교수의 내재적 접근방식은 비판의 여지가 크지만 송 교수를 둘러싼 파문이 학문적 쟁점에 관한 문제라면, 사법적 심사대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점을 두고 논란이 계속 증폭돼 왔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방불케 하는 힘없는 지식인의 한 항변인지 아니면 "도둑이 매를 드는" 상황처럼 교묘한 위장술인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 돼있는 상황에서 송 교수의 해명은 명쾌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보니 또 다른 의혹이 꼬리를 물고 증폭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으로선 그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법당국의 확고한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책임있는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의 의문은 왜 송 교수가 학자의 범주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일선에 뛰어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것도 가명으로 말이다. 그러니 '고급간첩'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됐다. 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계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철학자의 임무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는데 있다"고 설파한 마르크스의 말에 전적으로 매료됐기 때문일까. 더구나 그러한 선택이 유신사태 등 일련의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환멸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의 정치적 선택은 부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국가사회주의의 전체주의나 개인숭배는 자유민주주의에서의 독재나 권위주의와 같은 현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더 '큰 악'과 더 '작은 악'가운데 더 큰 악을 선택한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 송 교수가 한국에 정착하기를 진정 원한다면, 해야할 일이 있다. 진실과 허위의 경계선위에 서있는 '경계인'의 모습을 불식시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