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라는 국난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극복됐지만, 그 후유증은 산재해 있다. 그 중 아직까지 호된 시련을 겪고 있는 그룹들 중 하나가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 금융기관 및 부실기업의 임직원들이다. 2002년 말 현재 부실 책임으로 손해배상청구 소를 제기 당한 금융회사 임직원 수는 4천7백80명, 청구액은 1조3천1백91억원이고, 부실기업 임직원으로 소를 당한 사람은 1백28명, 청구액은 1천3백75억원에 이른다. 현재까지 예금보험공사가 제기한 1심 민사소송의 승소율은 70%이지만, 2심으로 올라가면 승소율은 급락할 수도 있다. 더구나 피고인이 재산을 도피한 경우엔 승소 하고도 공적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적자금 투입이 임직원의 세금포탈이나 횡령 때문에 이뤄진 경우, 예보는 대검 중수부에 설치된 '공적자금비리 합동단속반' 등에 수사를 의뢰하고 있다. 일단 그래야 공적자금의 강제적 회수가 더 용이하거니와, 재산도피 등으로 공적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 해당 임직원에 대한 형량을 통해서라도 국민의 세금을 소모시킨데 대한 확실한 책임을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가의 경영판단에서 부실원인이 발생했다면, 기업가와 경영인들의 책임과 권한을 규명하는 것은 예보에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보통 경영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과 그 성과가 나타나는 시점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기업가도 현 시점에서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기에, 경영의 판단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실패 및 실수는 기업가의 본원적 권리로 간주케 된다. 기업가에게 책임을 추궁하게 되는 범위가 선관주의의무와 충실의무로 한정돼야 한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관주의 의무는 경영판단의 의사결정을 할 때 기업가가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성실히 수집해 객관적으로 판단했느냐에 연관되고, 충실의무는 기업과 개인의 이해가 상충됐을 때 기업가가 얼마나 정직하게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는가에 연관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한국의 외환위기로 인해 노정된 부실금융회사 및 부실기업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자. 외환위기가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을 보면, IMF는 정례적으로 발표하는 '세계경제전망'에서 한국경제가 건전하다고 평가했고, 정부도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한국경제로는 전염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런 정보에 의거해 어떤 경영상의 의사결정을 해서 그 기업에 불이익이 초래됐다면, 해당 기업가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활성화하려면, 선관주의 의무에 대한 책임은 원칙적으로 부실 금융회사 및 기업의 임직원에게만 부가될 것이 아니고 헌법 1백19조에 규정된 '경제질서의 기본과 경제의 규제 및 조정'을 책임진 사람들에게도 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해당 정책당국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사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므로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그만큼을 기업가의 책임에서 공제해 줘야 마땅하다. 그러면 한국적 기업구조에서 충실의무는 어떤가를 보자. 주지하다시피 기업의 임원진은 대주주인 기업주와 전문 경영인들로 구성되고, 금융기관의 임원진은 금융기관 대주주인 정부가 임명하는 경영인들로 구성된다. 이런 상황에서 충실의무에 어긋나는 결정을 대주주가 지시했을 때 이를 정면에서 거부할 수 있는 임원이 몇이나 될 것인가? 한국의 부실기업 및 부실금융회사에서 대주주가 져야하는 충실의무와, 그의 의사결정에 거의 전적으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기타 임원의 충실의무 법적 책임의 가중치는 서로 달라야 한다. 예보가 철저하게 공적자금을 회수하는 노력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나 기업가정신의 저해라는 부작용은 최소화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예보가 기업가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려는 노력은 궁극적으로 기업가의 책임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동시에 기업의 전문경영인을 보호하는 좋은 장치가 될 것이다. < 경제학 cgrh@sw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