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輝昌 < 서울대국제대학원 교수·국제경영학 > 미국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에치슨은 '역사창조의 현장에서'라는 자서전에서 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을 얘기하고 있다.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자신을 포함해 미국 정부가 잘했던 것보다는 아쉬웠던 것을 솔직히 표현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손 안에 잡힐 듯한 것들이 나중에 보니 대부분 빠져나갔고 희망이나 성취보다는 절망과 좌절이 더 많았다고 에치슨은 고백했다. 우리나라에서 5년 임기를 마친 대통령들도 대부분 에치슨의 이와 같은 생각에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5년은커녕 1년도 채 안돼 절망과 좌절을 느끼면서 재신임 카드라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우선 외신의 반응을 보면 매우 부정적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떠나려면 지금 떠나라'고 했고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은 슈워제네거가 필요한 데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프랑스 르몽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혹자는 왜 외신부터 신경을 쓰냐고 할 지 모르지만 이들의 의견이 한국의 투자환경 평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제신용평가 기관들은 재신임 카드가 한국의 신용등급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우려 때문인지 우리 국민들은 매우 의미있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과반수가 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반면,동시에 과반수가 노 대통령의 재신임을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매우 절묘한 의사 표현이다. 외국의 신용평가 기관들은 한국의 신용등급을 평가할 때 이러한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는 노 대통령과 야당을 모두 혼란에 빠뜨렸고 양측은 유리한 전략을 수립하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번 사건으로 양쪽 모두가 패배자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여론조사의 첫째 항목인 과반수가 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노 대통령은 진 것이고,둘째 항목인 과반수가 노 대통령의 재신임을 지지하겠다는 것으로 야당도 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절묘하게 양쪽을 모두 패배자로 만든 것이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인보다 훨씬 높다는 얘기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역시 매듭은 대통령이 풀어야 한다. 해결의 핵심은 비정치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적 문제를 푸는 것이다. 현 상태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부정부패 척결이다. 요새 터지고 있는 비자금 사건들은 대통령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뇌물관행을 철저히 없애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 타협이 있을 수 없다. 국민들은 아직도 노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이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둘째,경제질서의 확립이다. 이해집단의 얘기를 다 들어주다간 끝이 없다. 경제원칙은 역시 시장원리다. 시장원리란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이다. 물론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문제가 심각하면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해결해야지 약자를 도와준답시고 시장기능을 망쳐버리면 안된다. 마지막은 국제관계이다. 최근 이라크 파병이나 시장개방에 있어 국익이냐 명분이냐로 의견이 엇갈리는 데 더욱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얄팍한 계산의 이기주의나 잘못된 논리의 명분론을 지양하고 국제사회에 신의가 있는 구성원으로 적극 동참한다면 결국 국익과 명분을 둘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난국을 정치적으로만 해결하고자 한다면 재신임을 받건 안 받건 노 대통령은 물론 국가 전체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세가지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야당이나 언론이 대통령을 필요 이상으로 트집잡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위기관리 능력이 강하다고 정평이 났다. 그러나 이상의 세가지 난국해결 방안은 묘수보다는 아주 당연한 정수이다. 국가 경영도 기업경영과 마찬가지로 위기 때일수록 기본을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이다. 국가발전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올바른 결단이 필요할 때다. cmoo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