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기업과 정치자금 ‥ 김정호 <산업부 대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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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가 SK 비자금 사건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SK 분식회계 사건이 분식회계→비자금→정치자금 논란의 절차를 밟게 될 것으로 익히 짐작은 했지만 일정 수준에서 사그라들던 예전의 경우와 달리 파문이 커져 나라 전체를 뒤흔들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정치권 스스로도 인정하듯 3류다.
정치가 1류였다면 50여년의 짧은 정당정치사에서 그토록 많은 정당이 명멸하고 숱한 이합집산이 일어났을리 만무다.
저마다 선명성을 내세우며 새로운 출발선상에 섰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헤쳐모여'는 선거를 치르기 위한 수단일 뿐,언제나 혼탁한 선거와 정치자금 파헤치기 소동이 뒤를 이었다.
기업들도 어김없이 혼탁한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하지만 기업은 조연에 불과했다.
주연은 역시 정치권이었다.
정치자금은 기업들이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약점을 이용한 정치권의 강요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번 대선 때 일부 정당이 대선자금 대책회의를 갖고 10여개 기업에 모금 할당을 주기까지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구태여 과거의 사례를 끄집어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정치자금의 고리에서 기업과 기업인들을 늘 서글프게하는 게 있다.
다름아닌 조연의 입지다.
주연은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 불사신으로 거듭나고 희생은 기업과 기업인들의 몫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SK 사태로 회사는 혼란에 빠지고 최고경영진은 줄줄이 옥고를 치렀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사례는 조연의 최후를 보는 듯해 씁쓸하기까지 하다.
대선자금 문제가 터지자마자 정치권이 서둘러 논의하고 있는 '고해성사'와 '대사면'도 그렇다.
고해성사→특별법 제정→대사면→제도개혁이라는 시나리오가 거론되는 것을 보고 과연 기업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물론 고해성사가 해결책이 될 수는 있다.
정치권은 고해성사를 통해 거듭날 수 있다.
기업도 되살아날 수 있을까.
예컨대 한 정치인이 고해성사를 통해 '어느 어느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이는 단순히 정치인의 양심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해당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여부를 공개적으로 확인받는 절차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들의 대외신인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고 금융시장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 게 뻔하다.
회사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A사,B사…'등 이니셜로 처리한다 해도 결국엔 소문이 돌아 비슷한 상황이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4당 대표들에게 말한 것처럼 '검찰의 공정하고 철저한 수사'로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검찰이 수사 중에 나온 기업과 기업인을 묻어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담은 그대로 기업에 떨어지고 만다.
손 꼽히는 대기업 치고 대선자금 정국에서 맘 편히 발을 뻗고 잠잘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없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SK글로벌 사태를 계기로 과거 분식회계를 대사면해주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재계가 쌍수를 들어 환영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수십억,수백억원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데 분식회계 말고 달리 방도가 있었겠는가.
기업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피해만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침체된 경제가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때만 되면 찾아오는 정치권의 혼란이 불황에 허덕이는 기업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파놓고 있다.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