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파란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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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22일 임진강 전투.중공군의 춘계 대공격이 시작되면서 영국 그로스터부대는 대대원 8백명으로 중공군 3개 사단과 맞서 싸워야 했다.
영국군은 우수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낫으로 풀 베듯 쓰러뜨렸지만 그들의 인해전술에는 속수무책이었다.
4일간의 철야전투가 끝날 즈음에는 불과 50명의 대대원이 살아 남았고,훗날 북유럽 연합군사령관에 오른 앤서니 파라-호커리 대위는 생포된다.
이 때부터 그가 겪은 28개월 동안의 포로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며 밤낮 없이 걷는 행군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면 쇠꼬챙이로 찔러댔고,영하 40도의 추위에 방치되는가 하면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붓는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받는 상황이 계속된 것이다.
파라-호커리 대위는 휴전협정과 함께 귀환되면서 영국으로 건너가 포로생활을 생생히 그린 '대검의 칼날(The Edge of the Sword)'을 써서 전쟁의 심각성을 일깨웠다.
이 책은 수십년 동안 유럽에서 스테디 셀러로 떠올라 있는데,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에야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으로 출간됐다.
때마침 국군포로의 생사문제가 제기되면서 이 책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며칠전 국방부는 귀순자와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4백96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확인된 숫자일 뿐,몇명의 포로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종전 당시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8만여명으로 추정됐으나 8천3백43명만이 송환된 채 협상은 종료됐다.
그 이후 북한은 "북한내 국군포로는 단 한명도 없다"며 협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10년 전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가 최초로 탈북하면서 북한의 주장은 완전한 거짓으로 드러났다.
미군의 유해송환과는 대조적이다.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국군포로들은 지금도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파라-호커리 대위의 증언은 이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