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배 감독의 데뷔작인 스릴러 '써클'(공동제작 무비캠 JU프로덕션)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담겨 있다. 합리와 비합리,진실과 거짓,질서와 무질서,좋은 인연과 악연,산 자의 육체와 죽은 자의 망령 등 상충되는 가치와 세계가 함께 등장한다. 이야기 구조도 엽기 살인범과 여검사의 두뇌 게임에다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을 연계시켰다. 논리를 추구하는 스릴러적 요소와 비합리적인 멜로 공간이 공존하는 셈이다. 영화는 난도질한 시체 옆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연쇄 살인마(정웅인)와 현장에서 체포된 그를 심문하는 다혈질 여검사 현주(강수연)의 악연으로 시작된다. 정신병으로 무죄를 선고받으려는 피고측과 살인의 동기를 밝혀 유죄를 입증하려는 검찰측의 대립이 팽팽하게 전개된다. 수사하던 중 발견된 소품인 '정사 도중 붙어버린 남녀 성기'는 영화를 스릴러에서 멜로로 전환시키는 장치다. 살인 사건을 70여년 전 화가 김광림과 기생 산홍의 비운의 사랑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합리와 논리를 추구해 온 검사가 비합리적인 전생과 후생의 세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전생을 지녔으며 후생에선 각기 다르게 얽힌 인연으로 나타난다. 도입부와 말미가 동일한 '수미쌍관의 양식'으로 드러나는 구성도 인생의 순환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런데 윤회의 방식은 무질서로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현주가 불임과 이혼,사고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은 전생에서 자행한 탐욕에 대한 징벌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전생에서 사랑의 희생자였던 김광림은 현세에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살인마로 다시 태어났다. 광림과 산홍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주변인들도 현세에서 각기 다른 역할로 주인공들과 연을 맺지만 인과율에 따른 것은 아니다. 각기 다른 차원과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끝없이 자리바꿈하면서 재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강수연은 현생의 검사이자 전생의 사랑에 눈먼 여성으로 두 가지 배역을 해냈지만 검사 역에선 지나친 감정 표출로 다소 어색하다. 코믹한 이미지에서 사이코 살인마로 변신한 정웅인은 악마적인 눈빛이 특징인 표정연기를 인상적으로 해냈다. 14일 개봉,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