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도 골프도 위기 관리가 중요합니다"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지난 96년 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경영을 물려준 이후 만 8년만에 처음으로 10일 언론에 모습을 나타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했던 이 명예회장을 카메라 앞으로 이끌어낸 것은 바로 '골프'였다. '골프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안시현 선수가 미국 LPGA 출전을 하루 앞두고 이날 소속사인 코오롱의 이 명예회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무교동 코오롱빌딩을 찾은 것. 이 명예회장은 안 선수를 반갑게 맞이한 뒤 자리에 앉자마자 난데없이 지난 9월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던 태풍 '매미'얘기를 꺼냈다. "골프계에 태풍이 불었네 그려.그동안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미국 LPGA를 휩쓸었는데 이제 또 하나의 태풍이 탄생했군요.안 선수 경기를 보고 있으니 '매미' 생각이 났다니까." 이 명예회장은 마침 '매미'가 왔을 때 그린 그림이 있다며 집무실 한 켠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로 안 선수를 데리고 갔다. 90년대 초반부터 취미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 명예회장은 퇴임 후 화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소나무 그림과 정물화 등 직접 그린 그림들을 가리키며 이 회장은 마치 손녀에게 말하듯 자상한 말투로 설명해 나갔다. 태풍 '매미'를 그린 풍경화 앞에 서자 이 회장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태풍 매미가 상륙했을 때 마침 경주에 내려가 있었어.며칠 동안 무서운 기세로 강풍이 몰아쳤는데 비가 그친 뒤 하늘을 보니 구름이 걷히는 틈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지.이 때다 싶어 캔버스에 그 풍경을 옮겼어.살다보면 폭풍우가 몰아치듯 힘든 날이 오게 마련이야.회사 경영도 그렇고,골프도 그렇고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게 제일 중요해." 이 회장은 "LPGA 가서 시련이 닥치더라도 언젠가는 비가 그치고 태양이 뜰 날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잘 극복해달라"며 '매미' 유화를 벽에서 떼어내더니 즉석에서 안 선수에게 선물했다. "경영에서 8년 정도 손을 뗐더니 욕심이 없어졌어.마음을 비우니 편안해.하지만 안 선수는 욕심이 있어야 해.'골프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골프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생각만 해야지." 85년부터 11년간 대한골프협회 회장(현 명예회장)을 맡으면서 국내 골프 꿈나무 육성에 앞장섰던 그에게 이번 안 선수의 우승은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게다가 안 선수가 FnC코오롱 '엘로드'에서 제작한 국산 골프채로 우승해 기쁨이 배가 됐다고.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어.특히 안 선수가 국산채를 사용해 이처럼 좋은 성적을 낸 것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야.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할 정도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말이니까.앞으로 골프용품도 선수들의 수준에 맞도록 '명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커졌지.코오롱도 아들(이웅열 회장)을 중심으로 해서 이 부분에 있어 최선을 다할 것이야." 안 선수와 함께 동행한 부모 앞에 서니 여든 노인도 어느새 부모 마음이 되는 듯했다. "우리 애들이 1남5녀인데 다들 싱글 수준으로 골프를 잘 쳐.난 잘 모르겠는데 다 재미있다고 하네.허허.우리 골프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무엇보다 부모들의 숨은 공이 컸어.박세리 김미현 선수도 모두 마찬가지야.앞으로 안 선수 부모님도 우리와 함께 뒷바라지 잘 해서 세계적인 선수들 키웁시다.그려." 이 명예회장은 마라톤의 황영조 이봉주 선수와 농구의 박찬숙 선수 등을 대스타로 길러내며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평소 스포츠(Sports) 웃음(Smile) 잠(Sleeping)의 '3S'를 건강을 위해 강조하는 등 스포츠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왔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