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경복궁 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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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리는 데는 수천 수만 마디 말보다 옛건물 한 채, 고서화 한 점이 낫다.
과거가 아무리 찬란했다 해도 흔적이 없으면 입증할 길이 없다.
유적과 유물, 유구(遺構)는 따라서 언제고 그땅 사람들의 흥망과 궤를 같이한다.
경복궁(景福宮, 사적 117호)의 자취 역시 우리 민족의 영욕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경복궁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태조 4년) 건립돼 2백년간 정궁(正宮)으로 사용됐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년) 전소됐다.
고종 2∼4년(1865∼1867) 창건 당시 3백90여칸보다 훨씬 큰 7천2백25칸반 규모로 중건됐다.
외척세력에 밀려 추락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대내외에 국력을 과시하려던 것이었으나 원납전 징수와 당백전 발행에 따른 경제 파탄으로 왕조의 패망만 앞당기고 말았다.
망국의 궁궐은 슬픈 법.애써 중건한 보람도 없이 합방 직후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천여칸이 헐리고,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 이후 다시 건물 대부분이 철거됐다.
정문인 광화문은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지고, 왕이 집무하던 근정전은 총독부 청사에 의해 완전히 가려졌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뒤 경복궁 복원이 계속되는 가운데 개ㆍ보수에 들어갔던 근정전(勤政殿ㆍ국보 223호)이 4년만에 우아하고도 장중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다.
기둥과 용마루 등에 생긴 하자가 지붕속 흙 무게 때문이라고 보고 서까래와 지붕 사이 흙을 덜어내는 한편 주기둥 4개를 바꾸고 콘크리트 바닥을 전돌로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튼튼하고 아름다운 근정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근정전의 '근정(勤政)'이란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다'라는 뜻이다.
조선조 역대 국왕은 이곳에서 백성을 다스릴 법령을 반포하고, 외국사신을 맞고,양로연같은 각종 위로연을 베풀었다.
근정전엔 회랑의 무늬 하나 그저 새겨지지 않았다.
정면 서쪽계단 옆 무쇠 드므(넓적한 독)도 그 속의 물로 화기(火氣)를 다스리려던 것이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御道)엔 1~9품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저마다 남의 탓을 하느라 시끄러운 이 가을, 모두 목소리를 낮추고 품계석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자신의 위치와 옛 역사를 돌아보는 건 어떨는지.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