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도덕적 해이'라는 말 만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도 드문 것 같다. 한국동란 이후 최대 위기라는 1997년 위기는 바로 우리 나라 기업과 금융회사 및 정부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발생했다. 우리 모두가 도덕적으로 해이해 져 위기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당한 것이다. 도덕적 해이는 정보가 불완전한 상황에서 대리인이 주인을 위해 어떤 책무를 수행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보의 불완전성으로 주인이 대리인을 잘 감시할 수 없을 때 대리인은 자신의 책무 수행에 태만해진다. 우리는 지난 몇년 동안 감시 기능을 보강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즘 다시 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들은 위험이 큰 기업대출을 줄이고 수요가 큰 가계대출을 늘려왔다. 그 결과 가계 신용불량 문제로 소비가 극도로 위축되고 소비위축은 경기 침체로 이어져 다시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자 신용불량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에 꼬박꼬박 빚을 갚아왔던 사람들이 자신들만 바보가 될 수 없다며 빚을 갚지 않겠다고 들고 나온다. 신용불량자의 도덕적 해이를 탓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면 신용위험을 덜어보려는 신량불량자 구제정책이 오히려 위기를 부추기게 된다. 도덕적 해이 현상은 채무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신용불량 문제를 일으킨 카드사 등 금융회사는 대출위험을 관리하지 않으면 금융회사의 존립기반이 사라지게 됨을 보고서도 가계신용의 수익성에만 집착하다 이 지경을 만들고 말았다. 따지고 들면 카드대출을 받은 채무자보다 금융회사 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훨씬 더 심각하다.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금융감독기관이 존재한다. 정부는 97년의 외환위기가 금융위기였다며 금융감독기관의 건전성 규제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정부의 공복인 감독기관도 따지고 보면 대리인에 불과하다. 경기침체로 신용판매가 감소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낸 건전성 규제가 지켜지기 어려움을 감지하고 카드사에 대한 현금서비스 규제를 완화한 데 이어 적기시정 기준, 대손충당금 적립, 채권추심 등의 건전성 규제까지 풀어주었다. 건전성 규제도 현실을 고려해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지만 외환위기 이전 감독당국의 도덕적 해이는 바로 현실 고려에서 싹트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렇게 채무자, 금융회사, 감독당국의 도덕적 해이가 심화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북유럽 3국과 유사한 가계신용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향후 있을지도 모르는 신용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계대출을 둘러싼 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해야 한다. 먼저 감독당국은 가계의 신용위험이 심각해진 이 때 자신들의 건전성 규제 정책을 세심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건전성 규제완화는 곧 카드사를 비롯한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감독당국의 도덕적 해이는 바로 자신들이 완전한 정보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둘째, 금융회사는 부실채권 감축 등 자신들의 자산건전성 개선 성과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대손충당금 적립 등 위험관리 체제 구축에 나서야 한다. 또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용불량자 구제대책이 오히려 자신들의 위험관리에 짐이 되고 있으므로 신용불량자 구제대책의 순서와 완급에 대해서 할 말은 해가며 정책당국과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채무자들은 악성 채무자에 대해 빚 감면을 해준다고 빚을 갚는 것이 바보짓이라는 오판을 해서는 안 된다. '배째라'식으로 나오는 채무자에게 금융회사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처럼 행동하게 된다. 또 오늘 빚 감면을 받은 채무자는 앞으로 신용거래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이며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아무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손쉽게 신용거래를 하는 세상은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다. wapark@hongi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