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말한 적이 있죠. 그런데 지금 기업인들 사이에선 '더 이상 기업을 못해먹겠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어요." ▶관련기사 A3면 모그룹 재무를 총괄하고 있는 A씨.그는 자신이 "요즘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참 속상해요. 막말로 정치인들에게 돈 뜯기고 그걸로 검찰에 불려가 망신당하고….물론 기업이 다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범죄집단으로 매도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A씨는 쉰 목소리로 끝도 없이 푸념과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기업이라는 조직이 이렇게 허약한 줄 몰랐어요.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발밑이 이토록 허망하게 흔들릴 줄도….검찰이 대선자금 외에 과거지사까지 다 들춰낸다면 어떤 기업이 견뎌내겠어요. 월급쟁이인 내 심정이 이 정돈데 오너는 오죽하겠어요. 참담함 그 자체지요. 아마 기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몰라요." A씨의 얘기에는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얽힌 실타래 같은 현실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갑갑함과 불안이 짙게 묻어났다. 동시에 검찰의 수사방식이나 우리 사회의 반(反)기업정서에 대해서는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실제 재계는 그동안 쥐죽은 듯 숨을 죽이며 검찰 수사를 지켜봐왔지만 막상 검찰이 총수들을 직접 겨냥해 압박을 해오자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노골적인 불만들을 쏟아내고 있다. 일부 기업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과연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도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차라리 본사와 사업기반을 중국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들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일시적인 투자위축이나 사업계획 수립 지연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사안이지만 기업가 정신 자체가 꺾이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20일 서울고법은 삼성전자 소액주주 22명이 삼성을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비자금을 전달한 것이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인정된다며 7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계 관계자는 "안주면 안주는 대로,주면 주는 대로 뺨을 맞아야 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한심하기만 할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