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대란설과 어수선한 정국 분위기로 인해 한국 경제에 대한 기본적 신뢰마저 위협받고 있다. LG카드 사태 이후 당장의 유동성 위기는 넘겼다고 하지만 이미 부채 상환 능력에 이상 징후가 보이고 있는 가계부문이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상당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3월 위기를 벗어나는 데 큰 역할을 한 개인 신용시장이 이제 장기침체의 단초로 작용할 수 있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현 금융권의 일련의 사태는 사회적 비용이 간과되기 쉬운 과점형태의 금융권 지배구조,인프라 미비에 따른 시장작동의 마비,개인적 비용을 사회적 부담으로 처리하려는 도덕적 해이와 감독 소홀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간과됐던 시장 위주 지배구조 형성이 지연된 결과므로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운 문제다. 거듭된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임 소재는 가리기 어렵다. 체제적(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불안의 결과는 서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카드사의 현금서비스는 그동안 서민 금융회사들이 퇴조한 공백을 메워왔다. 그러나 신용불량자의 양산으로 이제 오히려 카드사의 수익기반마저 위협받고 있다. 일단 카드사의 현금서비스에 의존하고 있는 소득계층은 불합리한 신용불량자 기준과 정비되지 못한 신용 관련 법체계로 인해 심리적·사회적 고통마저 감수하고 있다. 고용 기반은 소홀히 한 채 저소득계층에 대한 무분별한 신용공여는 예견된 부실이며 사회적 방치의 결과다. 물론 체제적 위험이 거론될 정도로 상황이 충분히 악화돼서야 작동되는 정책대응은 이제 더 이상 시장의 신뢰를 얻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카드사에 대한 불안은 체제 차원의 정책노력과 경기회복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사라지기 어렵다. 최근 일련의 연구결과들은 금융발전 없는 안정성장은 헛된 꿈에 불과함을 일깨워준다. 금융의 궁극적 기능은 자원 배분이며 이를 위해서는 정보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의 구축이 필요하다. 물론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특정집단의 영향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 위험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기초해 자금흐름이 다양화되고 편중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금융측면의 문제와 아울러 산업기반의 왜곡으로 인해 자금이 제대로 흘러갈 수 없는 근원적 한계에 봉착해 있다. 잠복된 위험요인은 정부의 묵시적 보증으로 식별도 어렵다. 그만큼 현재의 대응만으로는 체제적 개선을 위한 기초여건의 확보마저 쉽지 않다. 더욱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근본적 문제를 누가 단임제 하에서 책임지고 해결하려 할 것인가? 이제부터 모두가 참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경제부문의 효율성 추구만으로는 어렵다. 사실 대부분 경제문제의 원인 제공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사회지배구조상의 문제에 귀착된다. 환경은 개방됐는데 이를 소화할 만한 체제상의 준비는 기득권과 특정 이익집단의 안일한 태도로 지연된 것이 사실이다. 개혁 방향도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정부의 묵시적 지도와 정치권의 간섭 하에 기획·조율되고 있다. 시장이 존중돼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집단은 정치화의 덫에서 점차 무력화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치열한 경쟁속에서,거대시장 접근에 언제든 제동이 걸릴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해 도도한 시장원리는 존중돼야 한다.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금융부문의 능력은 안정성장에 필수적이며 이는 사회지배구조를 포함한 체제적 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해외자본을 수용해야 하는 개방경제야말로 가장 포괄적인 차원의 경쟁력 토대 위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절박성을 국민적으로 공감할 때 우리의 미래를 우리 실력으로 가꾸어갈 수 있다. 이제 경제주체 모두 그 동안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gpchoi@kif.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