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e-머신즈가 미국 시장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물론 저가(低價) 시장에서는 1위였답니다." 상기된 표정으로 회장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뛰어 들어온 이홍순 사장(현재 부회장)이 말했다. 1999년 여름, 삼보컴퓨터의 전략모델인 'e-머신즈'는 컴퓨터 기업의 대명사라 불리는 IBM을 제치고 11.8%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6백달러 미만의 저가 시장에서는 46%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의 거센 파고를 넘기 위해 운명을 건 승부수를 띄운지 1년 여. 신제품을 출시한지 8개월 만에 드디어 미국 시장을 석권한 것이었다. 1997년 말 해일처럼 밀려온 외환위기는 삼보컴퓨터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갑자기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삼보컴퓨터 주가는 반 토막이 났고, 판매부진으로 경영악화까지 심화되었다. 결국 일부 계열사를 정리하고 직원 중 20%를 내보내야 하는 쓰라린 고통을 맛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와중에서도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하루하루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정철 박사를 불렀다. 애플을 탄생시킨 스티브 잡스와 함께 컴퓨터 설계의 천재로 불리던 그였다. "정 박사! 우리 삼보컴퓨터가 살아남을 길은 무어라 생각하시오?" 정 박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내 눈만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초저가 컴퓨터를 만드는 길밖에 없소. 우리가 5백달러 이하의 컴퓨터를 만들어 봅시다." "5백달러 이하요?" 정 박사는 짧게 반문을 한 뒤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 박사는 머리 속으로 뭔가 계산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회장님,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윽고 그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홍순 사장과 정철 박사를 정점으로 한 개발팀은 곧바로 극비리에 초저가 컴퓨터 개발을 위한 'X-프로젝트'에 돌입했다. 1998년 9월, 삼보컴퓨터는 스페인 리스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e-머신즈'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원래 내가 발표할 순서는 빌 게이츠 뒤였는데, 빌 게이츠 앞에 발표하기로 한 사람이 펑크를 내어 발표순서가 빌 게이츠 앞으로 옮겨진 것이다. 당당히 단상에 오른 난 삼보컴퓨터가 5백달러 이하의 초저가 컴퓨터를 생산 공급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순식간에 발표회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기자들이 앞다퉈 인터뷰를 요청하는 통에 발표회장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다음 발표자였던 빌 케이츠는 단상에 올라 무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1998년 11월 e-머신즈가 출시되자 세계 시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삼보컴퓨터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1999년 상반기에만 미국에서 1백만대 이상의 수출 실적을 올렸으니 돌풍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5백달러 이하의 컴퓨터가 가능할 수 있죠?"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세계 유수의 부품업자중 3위 업체들만 불러 모았습니다." 실제로 우수한 기술력은 갖고 있지만 1,2위가 되지 못한 업체들을 골라 파트너십을 맺고 그들이 신제품 개발에 주력하도록 독려하고 지원했다. 이들 업체는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제품 생산에 성공한 것이었다. 삼보컴퓨터가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IBM PC의 확산 때문이다. 주로 중ㆍ대형 컴퓨터를 만들던 IBM이 1981년 가을 개인용 IBM PC를 발표하고, 이어서 16비트 XT급의 PC를 발표하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 때 국내 수출용 컴퓨터는 주로 애플 기종이었는데 특허항목이 많아 수출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나는 특허항목을 피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어 캐나다 미국 이집트 프랑스 등으로 소량 수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IBM PC가 시장을 급속하게 장악해 나가는 걸 본 나는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고, 누구보다 발 빠르게 IBM PC의 호환기종을 개발했다. 나의 이런 전략은 적중했다. 삼보컴퓨터 제품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곧 세계시장의 진출로 이어졌다. 미국에 컴퓨터를 한참 수출할 무렵 컴퓨터랜드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공급 계약을 해지하고 삼보컴퓨터를 받지 않겠다." 그 때 미국에 있었던 나는 당장 컴퓨터랜드로 날아갔다. 컴퓨터랜드에 도착해 보니 그 쪽 담당자와 삼보컴퓨터의 해외 영업자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삼보컴퓨터 제품이 고장이 잦아 반품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그것을 두고 서로 "너희들 잘못이다"라고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고장이 잦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가 컴퓨터 개발부서에는 전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나는 당장 다른 일로 미국에 출장 와 있던 강 부사장을 불렀다. "어찌된 일이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었단 말이오?" 그런데 나의 추궁에도 강 부사장은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저는 다른 급한 일이 있어 곧 떠나야 합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수출이 당장 중단될 처지에 놓여 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이오. 당장 컴퓨터를 고치고 대책 또한 세워놓고 출장을 가시오." 나의 호통에 강 부사장은 움찔하더니 "알았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컴퓨터에 한두 번 손을 대더니 곧바로 고쳐놓았다. "별 일 아닙니다." 알고 보니 컴퓨터 내부의 전력공급장치(power supplier)를 잘못 매달아 놓아 그것이 자꾸 떨어져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고쳐놓고 우리 쪽 담당자에게 전원장치의 위치를 아예 바꾸도록 지시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회사들은 판매에만 급급했지 A/S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삼보컴퓨터가 A/S의 중요성을 미리 깨닫고 확실하게 대처했더라면 초기에 미국시장에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건은 A/S에 신경을 쓰게 하는 결정적인 사례를 제공했고 이후 '똑같은 실수는 절대 반복하지 않는다'라는 큰 교훈을 남겼다. ----------------------------------------------------------------- [ 이용태 회장 약력 ] 33년 경북 영덕군 창수면 출생 57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69년 미국 유타대 통계물리학 박사 70년 한국과학기술硏 책임연구원 78년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80년 삼보전자엔지니어링 설립 87년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 88년 한국데이타통신 회장 96년 두루넷회장 99년 전경련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