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400만-이제는 신용이다] 제1부 : (3) 사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 60대 가스배달원 가족 사례 ]
신용불량자인 권태주씨(60ㆍ이하 가명)의 소원은 한 가지뿐이다.
혼기가 찬 두 딸을 흠 잡히지 않고 시집 보내는 것이다.
공무원인 큰딸 희정씨(27)는 지난 3월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희주씨(25)도 7월 신용불량자가 됐다.
아내(53) 역시 마찬가지다.
권씨 가족의 부채를 합하면 1억5천만원이 넘는다.
최근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은 권씨로부터 온 가족이 동반 신용불량자가 된 사연을 들어봤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에 다니던 권씨는 중동 건설붐을 타고 지난 80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갔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가족만 생각하면 힘든 줄 몰랐다.
남부럽지 않게 월급을 받았고,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권씨는 10여년간의 현장경험을 살려 91년 인력알선 사업에 손을 댔다.
국내 건설회사들이 믿을 만한 현지인력을 많이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사업전망이 괜찮다고 판단했다.
수년간 그럭저럭 끌어왔지만 97년 가을 사업파트너였던 현지인이 회사 재산을 빼돌리고 잠적하면서 시련이 닥쳤다.
일단 귀국한 권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보험설계사, 일용직 노동자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20년간 '사막' 생활만 했던 권씨에게는 모든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생활비와 자녀들의 학비부담은 늘어만 가고….
권씨는 2000년 정수기 회사의 영업직 사원으로 변신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뛰었다.
두 달 만에 월 매출 6백만원을 달성했다.
이후 세 달 만에 팀장으로 진급했고, 업무도 관리직으로 바뀌었다.
팀원들의 매출실적에 따라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였기 때문에 우선 '투자'가 필요했다.
직원 회식비와 광고비 명목으로 넉 달간 1천여만원을 썼다.
모두 카드 현금서비스로 충당했다.
연봉 2억원을 받는 '본부장' 직함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던 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옮겼다.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멈출 수는 없었다.
두 딸의 카드를 빌려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유배달을 시작한 아내도 돌려막기에 동참했다.
갚아야 할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수입은 뜻대로 나아지지 않았다.
연체가 시작됐다.
빚이 빚을 불러 갚을 길이 막막해져만 갔다.
2002년 8월, 권씨가 가장 먼저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
권씨의 채무는 총 3천4백여만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권씨는 쓰러지고 말았다.
중풍이란 진단이 나왔다.
당장 입원해야 했지만 병원비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집에서 대충 요양을 했다.
어떻게든 일어나야 했다.
기적처럼 중풍을 이기고 시작한 일은 가스 배달.
그러나 월급이 1백50만원 정도에 불과한 형편이다.
매달 이자내기에도 벅차다.
권씨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잘 안 됐다"면서 "가족들이 나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는 생각에 단 한순간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