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토박이 중산층 주부들에 들어보니] 정부실패 부동산·교육정책 덤터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서울 강남 토박이 중산층들은 요즈음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다.
연말 동창회를 나가도 "강남사람들은 부동산으로 부자가 됐으니 회비를 더 내야 한다"는 말들이 오갈 때면 졸부로 취급되는 것 같아 기분을 상한다.
자녀들의 수능성적이 좋아도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한 것보다는 학원 덕분이라고 간주된다.
강남엔 부동산 투기와 고액 불법과외가 다른 데보다 많은게 사실이지만 지난 25일 행정자치부 조사를 보면 과장된 측면이 많다.
강남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80%가 1주택 소유자들로 나타났다.
따라서 강남에서 오랫동안 집 한 칸 가지고 봉급이나 자영업 수입으로 살아가는 토박이로 자처하는 이들은 정부의 부동산과 교육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28일 서울 강남 도곡동 한 음식점에서 강남지역에서 10년 이상 거주한 중산층(월급생활자 및 소규모 자영업) 주부들과 부동산과 교육에 대한 방담회를 열어 이들의 불만과 생활현장에서 느끼는 정책대안 등을 들어봤다.
#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
신문이나 TV를 보면 정부 부처들 사이에 '강남 때리기 경쟁'이 벌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강남' 관련 보도들이 쏟아져 나와요.
'강남 부동산 세무조사 강화'는 재탕 삼탕이고 '강남주민 다주택 보유현황'에서부터 '담배 판매도 강남이 최고' 등 메뉴도 갈수록 다양해져요.
최근의 부동산 투기가 강남에서 시작돼 강남주민들이 투기의 원흉인 것처럼 치부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의 주택도시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교육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정부는 무능과 정책 실패를 인정하기는커녕 강남 탓으로 몰아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걸핏하면 '강남' 운운하는 발표를 하는데 너무 속이 상합니다.
요즈음 강남주부들은 너무 기가 죽어 백화점도 가지 않습니다.
'쇼핑도 여행도 가능한한 미루고 가만히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들 해요.
내수경기가 죽어 난리라고 하면서 소비계층이 가장 두터운 강남을 이런 식으로 몰아쳐 누구에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정부의 지방 살리기나 균형발전 슬로건에 공감하지만 이런 것이 '강남 대 비강남, 서울 대 지방' 이런 식의 편가르기식 정책으로 왜곡돼서는 안되겠지요.
# 강남사람들도 피해자
대부분 강남주민들은 집 한 채만 가졌을 뿐입니다.
많은 수의 강남주민들은 집값이 너무 오르는 걸 원하지 않아요.
팔고 다른데 갈 것도 아닌데 세금 부담만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설사 집을 팔더라도 강남 안에서 평수를 늘려 이사하는게 목표인데 큰 평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을 중산층이 좋아할 리 있나요.
남들은 강남에 산다면 부러워하지만 실제 상당수 강남사람들의 '삶의 질'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아이들 사교육비를 대고 나면 남는게 없어요.
오죽하면 "'서 있는 옷(정식매장에 진열된 옷)'은 커녕 '누워있는 옷(떨이 판매하는 옷)'만 살 수 있어도 다행"이란 말이 나돌 정도겠어요.
지은지 20년 된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수도에선 녹물이 나옵니다.
다른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지만 돈이 부족하고 강남을 떠나자니 아이들 교육문제와 편리한 교통, 다양한 문화시설, 양재천, 대모산 등을 버리기가 아까워 망설여질 수밖에요.
투기의 대명사처럼 된 타워팰리스만 해도 그래요.
13년 전 강남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타워팰리스 자리는 원래 행정타운으로 예고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주민 반발을 무릅쓰고 주상복합단지 허가를 내줬습니다.
정부가 도시 틀을 그렇게 짜놓고 집값이 치솟자 책임은 그저 강남에 살던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꼴입니다.
타워팰리스도 처음 미분양 때 회사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산 사람이 많다는데 그 이후 값이 오르자 입주자 모두 투기꾼 비슷하게 비춰지잖아요.
# 1가구에 십수년 살았는데
강남 집값이 오른 것은 정부가 몇 해 전에 분당ㆍ일산신도시의 고교 평준화를 시행하면서 강남에서 신도시로 갔던 사람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하면서 불 붙었다고 봅니다.
분당ㆍ일산신도시 건설 이후 10여년간 용인 등지에 지어진 주택단지를 가보면 물량은 엄청나지만 강남은 커녕 분당 일산보다도 수준이 훨씬 떨어져요.
주부들의 생활 안목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도시 수준은 오히려 떨어졌으니 강남의 희소가치가 높아질 수밖에요.
투기가 아니라 시장의 희소성 때문에 강남아파트 값이 올랐는데 정부는 강남주민들이 장난을 쳐서 투기바람이 분 것처럼 몰아치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정부는 강남의 모든 부동산 관련 세금을 대폭 높인다고 하는데 결국 1가구에 십수년 살아온 우리 같은 중산층은 퇴출당하고 강남은 그야말로 '부자들의 동네'로 변할 겁니다.
그러면 국민 위화감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강남 대체 도시도 없이 세금을 너무 때리는 것은 문제를 더 키우는 거라고 봐요.
# 공교육 수준 높여야
교육 당국은 집값과 사교육 여건이 상관없다고 하는데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입니다.
지방도시에서 명함깨나 내미는 사람들은 전부 강남으로 아이를 전학시키고 싶어 합니다.
맞아요.
현재 교육시스템이 학교 공부만으론 대학을 절대로 갈 수 없게 돼 있어 사교육을 잘 받아야 수능점수가 높아지고 그래야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얼마 전 서울대 총장이 신입생의 강남 편중현상이 심하다고 했는데 전부 강남 토박이 아이들이라고 보면 큰 착각입니다.
전국에서 돈 좀 있고 공부 잘하는 수험생들이 강남으로 몰린 결과 겉으론 강남학생들의 일류대 진학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겁니다.
정부는 '사교육 때문에 가계 부담이 커지고 경제에도 걸림돌이 된다'고 하는데 교육비를 부담하는 학부모 입장에서 보면 공교육이야말로 낭비로 느껴져요.
학교 교육은 아이들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교육방식이 낡았는데 반해 사교육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교육방법 이 갈수록 발전합니다.
졸업장만 아니면 학교 안 보내고 검정고시를 시키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런 현실에서 '밤 10시 이후에 사교육을 금지하겠다'는 정부 정책은 정말 '난센스'입니다.
사교육 없이는 대학을 못 가는데 학원공부를 단속하면 결국 집 안에서 비밀 고액 과외를 할 수밖에 없지요.
학원을 단속할 게 아니라 오히려 공교육을 제대로 못 시키는 학교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