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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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교수! 그동안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부터 맛 좀 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재무부장관 임명장을 주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러면서 내 손을 꽉 잡았지만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정부 정책을 비판한 글을 종종 쓴 것은 사실이지만 내 딴에는 어디까지나 건설적이고 온건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후 나는 10여년 동안 박 대통령 정부에서 일하면서 쓴맛 단맛을 다 본 셈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1969년 10월21일, 나는 재무부장관이 되어 행정부에 들어 선 후 1979년10월27일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그 분을 위해 파란 많은 세월들을 보냈고 사적으로는 단 맛보다 쓴맛이 많은 나날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정부에 들어가게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상세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던 무렵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서강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동시에 정부 정책의 자문 역할을 하고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평가교수단의 일원이 되어 회의에서 정책 문제에 대해 몇 번인가 보고를 했다.
그것이 박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1년 동안 공부한후 다음해 8월 귀국했는데 10월21일 뜻밖에도 내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라디오를 듣고 알게 되었다.
사전 연락을 하려고 청와대에서 나를 찾다가 시간이 없어 미리 발표한 모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직관적으로 수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우선 먹고 살자면 수입이 필요한데 수입 대금을 치르자면 수출을 해야 하지 않는가.
수출을 하자면 원자재 수입이 필요한데 그것을 가공하여 수출하면 남아 떨어지는 것이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수출을 하면 당장 먹고 살 물자 뿐만 아니라 경제개발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해서 이 나라 경제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첫째도 수출이오,둘째도 수출이다.
이러한 소박한 생각이 박 대통령의 수출 제일주의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란이 없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수출이 확대되면 선진국의 경제체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후진국 종속론을 주장하며 수입대체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경쟁력이 있는 농업부터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를 일축했다.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의 수출 제일주의가 우리 경제를 성장 궤도에 올려 놓은 것이다.
자금난으로 기업계의 아우성은 계속 되었다.
자기자본이 빈약한 기업들이 1년 기한의 단기자금을 빌려 몇 년이 걸리는 장기투자에 투입하다 보니 언제나 운전자금이 부족하고 어쩔 수 없이 사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은행에서 돈을 풀면 인플레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수출 기반을 약화시키게 된다.
1969년에 경제성장률은 13.8%로 경이적인 것이었지만 그 해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2.5%였다.
그런데 세계경기 불황의 여파로 1970년의 경제성장률은 7.6%로 뚝 떨어졌으나 물가는 16.1%나 상승했다.
당연히 경제지표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김용완 당시 전경련 회장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대통령에게 업계의 자금난과 사채 문제를 읍소했다.
여기에서 발단한 것이 1972년 8월3일의 사채동결 조치(속칭 8ㆍ3 조치)이다.
대통령의 특명으로 청와대 비서실장, 김용환 경제 수석, 그리고 나 자신이 주축이 되어 극비리에 8ㆍ3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 조치가 기업에 일시 도움을 주고 사채의 문화적 고질을 혁파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정부가 금리를 통제하는 한 사채는 재발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유재산권의 침해를 회피하기 위해 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그 후 국회 특별위원회에 불려나가 1개월동안 국회의원들의 모진 질타에 시달렸다.
그러나 만성적 자금 부족이 더욱 가중되는 일이 벌어졌다.
1973년 1월1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중화학공업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동안 대통령비서실 경제 제2수석비서관 오원철씨를 중심으로 청와대에서 비밀리에 중화학공업 개발계획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중화학공업 개발계획은 매우 야심적인 계획인데 이 방대한 투자계획을 뒷받침하는 자금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 후 중화학공업 개발에 관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자원 조달 문제를 거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중화학공업 반대론자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어느 날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과거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배하였소. 그러나 지금의 일본은 어떠합니까?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이 다시 분발하여 일본을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민족에게 패기가 없으면 그 민족은 살아 남기 힘듭니다. 나는 이 나라에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경제의 운명을 걸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남 장관은 기운을 내서 잘 해 보기 바랍니다."
대통령은 나에게 타이르듯 말했지만 그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하고 동시에 대통령도 자원 조달을 크게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 월남이 패망한 후 다음 공산화 차례는 한국이라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 국제 언론에서 유행했는데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위해 중화학공업의 개발을 서둘렀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학계와 언론의 비판이 있자 대통령은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자는 것이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론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두고두고 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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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우 前 총리 약력 ]
24년 경기도 광주군 출생
50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61년 미 오클라호마 주립대 경제학 박사
64년 서강대학교 교수
69년 재무부 장관
74년 경제기획원 부총리 겸 장관
79년 대통령 경제담당특별보좌관
80년 국무총리
83년 한국무역협회회장
99년 동북아경제포럼 위원장
2003년 한ㆍ일협력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