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허브! 무슨 허브?..정규재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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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못하는 학생일수록 공책은 새 것인 경우가 많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며 새 필기구와 책상을 사기 위해 문방구와 가구점부터 쏘다니기 시작한다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50만 수험생이 마음을 태우고 있는 이 입시철에 굳이 공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부가 동북아 금융허브를 추진하겠다면서 시작하는 일이 바로 어리석은 학생이 공부 장비(?)부터 갖추어야겠다고 서두르는 모양새와 다를 바 없어서다.
물류허브는 포기한 것이며 R&D센터는 중단한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금융허브라는 말을 내걸어놓고 하는 일이 고작 '한국투자공사(KIC)' 설립이라면 상상력의 빈곤과 논리의 비약,사고의 엉뚱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투자공사건 투자청이건 그것이 금융허브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부터가 궁금하다.
정부가 할 일이 없어서 외환보유액을 헐어 직접 금융장사에 나선다는 것이며 그 자금을 미끼로 외국의 유수한 금융회사를 유치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지 모르겠다.
알려진 바로는 외환보유액에서 1백50억달러,외평기금에서 50억달러,또 공공기금에서 얼마간을 추렴해 총액 2백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모은 다음 이를 동북아 금융허브의 지렛대로 쓴다는 것이다.그러나 그 돈으로 금융허브가 만들어질 바에야 외환보유액이 7천억달러에 육박하는 일본과,6천억달러에 달하는 중국이라면 몇 개의 허브를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외환보유액을 고수익자산에 효율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명분과 동북아 금융허브의 지렛대로 쓰겠다는 실리가 상충적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국은 그 또한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은행보다 자산운용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도 우습지만 외환보유액을 '정책적으로' 운용하기로 들 때 그 수익률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국제 금융계의 '빅 네임'들을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발상 또한 정세를 안이하게 판단한 결과다.
이미 대부분 은행이 외국투자자에게 팔려나갔고 자산운용시장이 외국자본에 점령되다시피 한데다 남은 것이라고는 증권회사 정도인 상황에서 무슨 외국금융사를 또 유치하겠다는 것인지 당국은 대답할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 등에서 거래되는 역외 NDF 시장을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계획은 차라리 코미디다.
당국은 바로 어제도 외환시장에 개입해 원화를 '나홀로 약세'로 뒤틀어놓고는 "경기부양을 위해 우리의 할 일을 다했다"고 자위하고 있는 터다.
항차 분초를 다투며 스스로 내달려가는 역외 선물환 시장을 유치하겠다면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때마침 매킨지사는 "서울은 금융허브 최하위권 도시"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매킨지가 지적하고 있듯이 서울이 금융허브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금이 열세이고 시장이 협소해서가 아니라 정부 규제가 맹위를 떨치고 신용평가 능력 등 금융인프라가 지극히 취약한 때문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
당국이 새삼 투자청을 만들려고 하는 바로 그런 발상이야말로 동북아 금융허브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조소다.
증시를 육성한답시고 팔리지도 않을 상품(KELF)을 만들어 놓고는 고위 인사들이 줄지어 사진 찍는 식으로 금융허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투자공사를 만들고,사진 찍고 테이프 자르고,몇 건의 자산운용계약을 맺는다고 허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움켜쥐고 있는 행정규제를 풀어놓는 것부터,그리고 정부 권력을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장의 권력,다시 말해 금융허브 구축작업은 비로소 시작될 따름이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