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김덕성 <(주)유니더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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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나는 콘돔을 팔러 태평양을 건너갔다.
콘돔 만드는 기술이라면 미국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던 때라 솔직히 자신감이 없었다.
예상대로 미국인 에이전트들은 잘 만나주지를 않았다.
간신히 면담이 주선되어 한 에이전트를 만나 가방 속의 콘돔 샘플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상자에서 콘돔 하나를 꺼내 호일 포장지를 뜯었다.
의심쩍은 듯 연신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갑자기 잡아당겨 보고 콘돔에 바람을 넣어 세게 눌러보기도 했다.
속타는 내 심정을 아는지!
그가 검사를 하는 동안 목이 타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검사 중 행여 손톱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모든 제품은 '불량'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그가 머뭇대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품만 봐서는 괜찮은 것 같은데, 한국산 제품이라서…."
"우리 콘돔은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등지에 수출돼 이미 품질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들 역시 후진국들 아니오!"
콘돔은 품질이 생명이므로 후진국에서 만든 것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실제로 사용해보라고 권할 수도 없고, 직접 시험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쳇말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동시에 시선이 TV에 집중되었다.
자동차 광고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우리의 현대자동차가 등장하는 광고였다.
"앗, 저것은 우리 코리아의 자동차입니다."
"오! 그래요. 한국이 자동차를 수출할 정도로 공업수준이 향상되었다면 콘돔도 믿을만 하겠구려."
현대자동차 광고는 단숨에 분위기를 역전시켜 계약을 성사시켰다.
민간기업이 수출을 통해 국가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제품이라는 이유로 외국에서 배척당하던 때 자동차 수출이 한국 상품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콘돔의 수출 길도 열리게 된 셈이었다.
콘돔이 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다 보니 유교적 관습에 젖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터부시하거나 숨겨왔다.
하지만 부산지역에서 약업상을 크게 하던 평소 알고 지내던 연기식씨는 달랐다.
그는 제조업을 해보겠다며 콘돔을 제조하는 동국물산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나는 이 회사에서 수출입을 담당했다.
그는 자주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해보라"는 충고를 했다.
1968년 대규모 콘돔 입찰이 있어 인도에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공항 검색대에서 가방에 가득 담긴 콘돔을 발견한 세관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당신 혼자서 다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그에게 무어라 대답할까?
인도의 입찰에는 미국과 일본 등 쟁쟁한 업체들이 12곳이나 참가했다.
그러나 품질을 이유로 일본만을 제외한 11개 업체를 탈락시키자 미국업체가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였다.
2차 입찰이 다시 열리고 최저가를 적어낸 우리 회사로 행운이 돌아왔다.
그 후 인도에 1백만 그로스(1 gross=12다스, 1백44개)를 수출하게 되었다.
1973년 서흥산업을 설립하고 국내 자체기술로 수술용 장갑 기계를 제작했다.
막상 제품을 만들고 보니 판로가 막막했다.
일본이나 미국은 후진국 제품에 대한 골 깊은 불신 때문에 벽을 넘기 어려웠다.
곰곰이 생각하다 비행기 머리를 지구 정반대로 돌려 중동으로 향했다.
당시 이 지역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무역상들뿐 아니라 누구도 발을 들여 놓으려 하지 않는 곳이었다.
전쟁터에서도 부상자는 발생하기 마련이라서 의료용 장갑이 많이 팔릴 것이라는 추측은 다음날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각지에서 에이전트들이 찾아와 상담을 요청해 왔고, 의료용 장갑 샘플을 보고 만족을 표시하며 많은 수량을 주문했다.
1년 내내 생산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더구나 예상치 않았던 콘돔 주문까지 끊이지 않고 밀려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슬람 문화권은 남자들이 여러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 살기 때문에 성 문제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1987년 또 한번의 전쟁이 터졌다.
포연과 총성은 없지만 인류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AIDS(후천성면역결핍증)와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감염경로가 밝혀지자 않아 전전긍긍하는 의사나 간호사는 물론 간병인조차 개인위생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즈음에 미국 뉴욕의 무역상이 찾아와 우리 제품들을 살펴보고 '환상적(fantastic)'이라고 평하며 생산되는 대로 모두 수입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공장에 생산라인을 증설하고 밤낮 없이 생산해도 모자랐다.
그러니 국내시장에 공급할 수술용 장갑과 콘돔은 절대적으로 부족해 창고에 물건이 동났다.
알고 지내던 병원관계자나 심지어 정부당국의 여러 관계자 등 온갖 경로를 통해 물건을 먼저 공급해 달라고 압력 아닌 압력이 가해졌다.
6개월 정도는 사무실 밖에서 업무를 봐야 할 정도였다.
이때 충북 청주에 있는 제1공장에 이어 증평에 제2공장을 설립하고 최신 자동설비를 설치하여 증가하는 주문량을 맞출 수 있었다.
2002년 11월에는 중국 장가항시에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단독투자법인을 설립하였으며 총 투자규모 1천만달러로서 연간 6억 개의 콘돔을 생산할 수 있도록 증설 중에 있다.
이 공장에서는 중국 내 상위 5% 안의 인구를 겨냥해 최고급 콘돔 제품을 생산 판매할 계획에 있다.
콘돔을 제조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술자리에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거나 이상한 물건으로 돈 번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어느 신문에선가 독자의 시선을 끌어볼 요량으로 우리 회사 여사원들의 작업과정을 소개하면서 '콘돔 만지는 여자'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어 항의를 한 적도 있다.
속사정을 알고 보면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회사에서도 콘돔의 핀홀과 외관상 불량을 선별하는데 여성 종사자들의 손에 의해 콘돔이 몰드에 꽂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래도 한 길만 걸어온지 30여년.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있고 그것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는 내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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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성 사장 약력 ]
41년 경북 경주 출생
67년 성균관대 상학과 졸업
67년 동국물산 입사
78년 서흥산업 대표이사
80년 수출의 날 대통령 표창
81년 보사부장관 표창
89년 무역의 날 산업포장 수상
98년 중소기업 대상 수상
2000년 유니더스로 상호변경
2001년 납세자의 날 성실납세자 대통령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