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못한다." 오래 전부터 군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겨온 이 격언은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케팅이나 재무전략의 실패는 다시 만회할 기회가 있다.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다. 하지만 핵심기밀 유출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해당 기업에 안겨다 준다. 노출은 순간이지만 많은 돈을 들여 수년간에 걸쳐 확보한 비교우위는 허망하게 사라진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이승철 조사본부장은 "주요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이 본격화되고 해외 인력들의 스카우트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산업기밀의 외부 노출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상시 구조조정으로 내부 직원들의 신분이 불안해진 것도 산업스파이가 암약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적발금액만 14조원 PDP 다면취 기술(3조원),휴대폰 운영소프트웨어 소스코드(4천억원),미생물 발효장비 제작기술(1천억원),휴대폰용 컬러모듈기술(4조3천억원),국책연구소 IMT-2000기술 유출사건(6조1천억원) 등 국가정보원이 올들어 적발해낸 주요 산업스파이 사건의 예상 피해금액은 14조원이 넘는다. 지난 5년간 적발된 사건의 피해예상금액이 총 40조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 한햇동안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셈이다. 국정원에 적발돼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이 정도라면 실제 유출된 기술은 이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기업 관계자는 "해외 경쟁사가 발표한 신기술이 우리 것을 그대로 베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며 "하지만 뒤늦게 유출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경쟁업체에 항의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털어놓았다. ◆IT(정보기술)업종에 집중 국정원이 분석한 분야별 산업스파이 사건을 분석해보면 정보통신과 전기전자 업종이 전체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지면서 신기술 개발속도가 빨라지고 국제시장의 경쟁도 더욱 첨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두드러지는 경향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한국산 휴대폰이 산업 스파이들의 주요 표적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적발된 휴대폰 핵심기술 유출사건이 대표적이다. 국내 휴대폰 제조업체인 B사의 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윤 모씨는 B사에 휴대폰 충전기 소재를 납품하고 있던 H사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윤씨는 지난해 10월께 H사로부터 돈을 빌려 ㈜카이로텍을 설립,자신의 부하직원을 대표이사로 앉혔다. 윤씨는 회사의 진용이 갖춰지자 지난해 12월 말 B사가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개발한 휴대폰 모델의 운영 소프트웨어를 CD에 복사해 카이로텍에 넘겨주었다. 윤 모씨는 ㈜카이로텍에서 개발 중인 중국향 휴대폰에 부품이 급히 필요하자 B사의 생산본부 구매팀에 핵심 부품들을 음성적으로 반출토록 요청해 성사시켰다. 윤 모씨는 B사 외에 국내 동종업체의 기술정보도 수집해 카이로텍에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20년 이상 회사에 근무해와 회사의 기밀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중역이 범행을 주도했다는 측면에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