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우리 사회의 미래이다. 오늘의 한국 청소년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대학입시 면접 수험자들에게 왜 정경대학을 지원하는지 물었다. "저희나라에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고시를 보아 약자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공무원은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지 약자를 위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노점상 무허가주택 같은 것은 오히려 단속해야지 이들 편을 들면 안돼요. 남을 돕고싶으면 시민봉사단체나 사회복지학과를 지망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정경대학에서 공무원 준비를 하겠습니다." "오늘 온 학생들 대부분이 군처럼 약자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 되겠답니다. 그런데 고시에 패스한 뒤에는 복지부를 거의 지원하지 않아요. 무슨 까닭일까요?" "…." "학생들은 '저희나라'라고 하는데 그럼 나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같은 나라에 사니까 앞으로는 '우리나라'라고 합시다." 학생들은 놀랍게 '코드'가 일치했다.90%가 농민 노동자 환경주의자 편이었고 국가교육정보시스템(NEIS)을 부정하고 스크린쿼터를 지지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특권층의 기회독점으로 보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두 사람 만이 세종대왕과 박정희 대통령을 꼽고 나머지 40여명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적했다.참여정치를 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들이 대체 1년도 안된 노 대통령의 치적을 얼마나 아는 것일까. 단호히 결론내린 정치 경제 문화 환경문제는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학생들은 앞으로 새로운 지식과 경험에 접하며 바뀔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깨끗한 두뇌에 최초로 각인된 이념적 반흔(瘢痕)이 쉽게 지워질 수는 없다. 전교조의 교화력은 실로 거대하다. 그들이 이런 신세대를 복사기처럼 찍어내 왔고 그 신세대가 현 정부를 탄생시켰다, 지난 한햇동안 사회적 혼란, 갈등과 낭비가 끊이지 않았으나 우리는 앞으로 올 긴 '혁명'의 시작만 본 것이 아닌지 모른다. 참여정부는 이제 1년이 겨우 지나지 않았는가. 시장경제에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는 2백30년 전 애덤 스미스가 가장 명료하게 설파했다.푸줏간 주인은 고객이 가져온 돈만큼 고기를 썰어준다. 그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자기역할만 할때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에 최적의 자원고용과 자연적 조화(natural harmony)를 인도한다. 그런데 그가 고상한 사회를 이룬다고 인간을 평가해 고객마다 저울질을 달리하면 사회를 오히려 혼란에 빠트린다. 사람들이 각가 다른 이념적 기준아래 활동할 때 이를 조정할 사회적 기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지구촌이 하나의 시장경제로 묶인 오늘날 국가사회에나 개인에게나 필요한 교육은 분명하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로 길러주고 그런 능력을 존중하는 질서의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국가나 기업에서나 능력있는 자가 기용되고 승진하며, 학생은 자기발전에 노력함으로써 사회참여의 기회가 증진된다고 배우는 것이다. 능력은 기르지 않고 로또 뽑듯 역선택의 기회만 기다리다가는 개인도 국가사회도 낭패하고 망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무엇이 바른 사회인가부터 배운다.나눔은 좋고 차별은 나쁘며 노력과 능력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기회를 갖는게 최선의 사회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생산보다 몫을 나누는 형식에 골몰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데 집착하게 된다. 현 정부의 코드 맞추기나 전교조의 내편 만들기가 그 전형이다. 약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건 실로 보람된 일이다. 국가의 사회복지계획,성탄절 자선남비,이웃돕기나 자원봉사는 많을수록 좋다. 그렇지만 이런 자원은 기업 개인 정부가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할 때 쌓인다. 만약 사회인 모두가 로빈 후드로 길러진다면 인심 낼 곳간은 누가 채울 것인가. 미래는 신세대의 몫이고 그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전교조를 출생시킨 것은 기성세대다. 2003년을 보내며 전국의 학부모는 언제까지 전교조의 횡행을 방치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