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나는 뉴욕 근교에 있는 작은 작가 촌에 머물고 있었다. 그 작가 촌은 한 출판인의 기부로 세워진 창작 산실인데,세계에서 모여 든 작가들의 창작 열기로 가득했다. 열기란 무슨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어서가 아니고, 사방 그윽한 고요 속에 집필에 여념이 없는 작가들의 열정이 만드는 것이었다. 저녁이면 포도주를 마시며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한 가지를 보았다. 사슴이 뛰어 노는 초원도 아니고 사과가 가득 열린 숲도 아니다. 또한 수준 높은 조각품이 설치된 조각공원의 멋진 풍경도 아니다. 작가 촌 식당 한 켠에 놓인 생수통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무실이나 휴게실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생수통은 그러나 한가지가 달랐다. 그것은 찬물은 틀면 잘 나오지만 뜨거운 물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작가들은 차를 마시고 싶을 때마다 뜨거운 물을 받느라고 번번이 그 생수통 꼭지를 비틀며 애를 썼다. 결국 시간제로 들르는 직원이 그것을 힘 주어 꾹 눌러 트는 법을 설명하기까지 우리는 그 생수통이 고장난 것이라고 여길 지경이었다. 그 것은 혹시 어린이가 쉽게 뜨거운 물을 틀어 손을 데일까봐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나는 설명을 듣는 순간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시랜드 화재'가 떠올랐다. 그리고 죄 없이 불 속에서 스러져간 어린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려 한동안 쓸쓸하게 그 생수통을 바라보았다. 이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인 이유는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 파워나, 풍요한 경제력보다 바로 이렇듯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절절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아끼는 마음은 뉴욕으로 오는 미국 국내선 비행기에서도 보았다. 한 뚱뚱한 백인 아주머니가 다른 자리가 아닌 바로 내 옆자리에 앉을 때였다. 나는 그만 숨이 콱 막혀와 서 속으로 "아이구, 하필 내 옆자리일게 뭐람"하고 투덜거렸다. 그런데 조금 후 그녀가 친절한 말씨로 나에게 잔돈을 바꾸어 주기 위해(기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잔돈을 따로 내야 했다) 우리 옛 어머니들처럼 옷 속에 깊이 숨겨둔 돈을 꺼내느라 고개를 수그렸을 때 그만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은빛 목걸이는 다름 아닌 장기기증의 목걸이였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쓰러지건 간에 나의 모든 장기를 필요한 대로 모두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마치 눈부신 천사로 다가오는 것을 목격했다. 뚱뚱한 체구만 보고 내 자리가 비좁아질까봐 이기적인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진실로 생명을 아끼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선진국임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충격적인 여러 뉴스 중에서도 가장 기막힌 뉴스는 추운 강물에 남매를 던진 아버지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파트 옥상에서 아이를 안고 떨어진 주부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고, 생활고에 아이들과 함께 동반 음독을 한 가장의 소식이 이어지더니 결국 그런 입에 올리기도 힘든 사건까지 일어난 것이다. 그 것은 한마디로 용서받기 힘든 범죄이다. 제발 정신착란증 환자였을 거라고 믿고 싶은 그런 비정의 잔혹함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깊은 사죄와 반성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생명의 가치와 존엄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리 가득 성탄의 불이 밝혀지고, 한 해를 보내고 또 희망을 마련하려는 모임의 소식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내가 이번에 미국에서 진실로 배워 가져오고 싶었던 것은, 백악관의 파워도, 월가의 활력적인 경제지표도,노벨상 수준의 문학도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세심한 사랑과 배려가 넘치는 그 생수통이었다. 그 생수통을 우리 마음마다 매달아 놓고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맑은 생수처럼 나누어 마시고 싶다. 그리고 천사를 닮은 모습으로 눈부시게 날개를 펼치며 다시 일어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