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겨울은 참 추웠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1월 말이면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내렸고,동지 섣달 두 달은 대부분의 집에서 심한 외풍에 시달렸다. 시골집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도 변두리 허름한 집에선 새벽이면 방에서도 손이 시리고 심지어 자리끼에 살얼음이 얼었다. 연탄이 거의 유일한 난방수단이던 그 시절,구공탄 관리는 큰 일이었다. 연탄을 갈려고 보면 아래 위 2장이 붙어있기 일쑤고 연탄집게로 떼다 안되면 부엌칼까지 동원했다. 억지로 떼어내다 보면 아래쪽은 부서져 엉망진창이 되고.한밤중이나 새벽에 가는 걸 놓쳐 꺼뜨리기라도 하면 방바닥이 얼음장처럼 되는 건 물론 새로 불을 붙이느라 매운 연기를 잔뜩 맡아야 했다. 연탄가스 중독 뉴스가 사흘이 멀다 하고 터져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쌓아둘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연탄이 떨어지면 새끼줄에 꿴 한두 장을 사들고 뛰어야 했다. 그러니 겨울을 앞두고 쌀 두어 가마니와 연탄 2백장만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든든하고 행복해 했다. 안도현씨의 '연탄 한장'(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연탄차가 부릉부릉/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이라는 시는 바로 이런 시절의 정경을 보여준다. 형편이 나아지고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연탄의 수요는 줄었다. 연탄 트럭도,골목 어귀에 쌓인 연탄을 나르던 지게도 보기 어렵다. 한장에 3백원이라는 값도 모르는 이가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연탄이 아쉬운 곳은 많다. 각종 복지시설은 물론 혼자 사는 노인과 달동네 가난한 사람들 집의 외풍은 여전히 심하고 방을 덥힐 연탄은 모자란다. 성탄절이다. 요란하게 먹고 마시는 송년회 대신 그 비용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연탄을 사주는 직장인,방학을 맞아 연탄배달 봉사에 나선 학생들이 늘어난다고 하거니와 집집마다 교회마다 힘겨운 이웃에게 쌀 한말 연탄 몇장이라도 나눔으로써 성탄의 참의미를 되새기는 날이었으면 싶다. 대리석으로 근사하게 잘 지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도 좋겠지만 넉넉해진 연탄 덕에 한결 따뜻해진,고단한 이들의 '가난한 방'에서 올리는 예배도 괜찮을 것같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