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카드의 유동성 위기가 정점으로 치달았던 지난 11월 하순의 이른 아침.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국내 주요 은행 간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금융감독원이 소집한 긴급 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회의에서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상황의 긴박함을 설명했고,은행측 참석자들은 2조원의 긴급 지원자금을 조속히 집행하기로 결의했다. 자산규모 23조원이 넘는 LG카드가 잘못될 경우 금융시장 전반에 엄청난 충격파를 미칠 게 뻔한 터에 누구도 발을 빼겠다고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시종 긴장된 분위기가 팽배했던 이날 회의에 그러나 몇몇 채권 은행은 참석하지 않았다. 외국계 기관이 경영권을 장악한 외환은행과 제일은행 한미은행 등이었다.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국내 금융회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던 감독당국의 "영향력"이 외국계 은행들에는 더이상 통하지 않음을 여실하게 보여준 현장이었다. ◆정부가 자초한 딜레마 LG카드 지원 대열에서 외국계 은행들이 이탈한 데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올 것이 왔다"고 말했다. 97년말 외환위기 이후 부실에 빠진 국내 금융회사들을 '외자 유치 드라이브'속에서 잇달아 외국인들의 손에 넘길 때부터 예견된 '사태'였다는 얘기다. 경제의 혈맥인 자금중개 기능을 맡고 있는 금융업은 국가경제에서 비중이 큰 특정 산업이나 기업의 일시적인 자금위기 때는 '소방수' 역할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공공적 기능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철저한 수익논리로 무장한 외국계 금융회사에 그런 공공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 카드대란 등 일련의 금융위기에서 감독당국이 외국계로 넘어간 은행들을 장악하지 못한채 '반쪽짜리 대책'만을 내놓고 있다는 지적은 이런 '상황 변화'의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하지만 국내 핵심 금융회사에 공자금을 투입한 뒤 외국 자본에 넘긴 장본인이 정부였던만큼 최근의 '금융시장 통제권 위기'는 당국 스스로가 자초한 업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외자유치 만능주의가 스스로를 외통수로 몰아넣었다는 얘기다. ◆급증하는 외국계 장악력 지주회사에 편입된 조흥·대구·부산은행을 제외한 국내 시중은행(지방은행 포함)의 외국인 지분율은 23일 현재 평균 42.03%에 이른다. 뿐만 아니다. 외국인이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제일·외환·한미은행 및 외국계 은행 국내 지점의 총자산은 국내은행 총자산의 26.7%(6월말 기준,시장점유율)로 높아졌다. 6.9%에 불과했던 98년 이후 5년 사이에 네 배 가까이 불어났다. 보험업계도 외국계의 진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외국계 생보사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1998년 1%에 그쳤지만 99년 4.6%,2000년 5.7%,지난해말에는 10.5%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증권회사의 경우 외국계의 시장점유율(증권위탁거래대금 기준)이 30.7%까지 상승했다. ◆공방 치열한 외국자본 역할론 외국 금융자본의 '수익성 치중' 비판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본의 국적성은 중요하지 않다. 기업은 주식시장과 같은 직접 금융시장의 확대를 통해 자본을 확충하면 된다. 은행의 안정자산 선호와 이윤추구는 오히려 기업의 투명성과 경쟁력 강화로 귀결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같은 당국자들의 인식은 현실을 외면한 '이상론'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과거 대우그룹 워크아웃을 담당했던 은행 관계자는 "외국계 은행들은 워크아웃 업체에 대한 지원은 물론 졸업시켜 주겠다고 해도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 제일은행이 아시아나항공,대우종합기계 등을 부실채권으로 분류해 풋백옵션을 행사했던 경우도 마찬가지 사례로 지적된다. 논란의 또 한가지 포인트는 '돈'이다. 한국에서 금융업을 영위할 만한 자본이 형성돼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부동자금이 4백조원을 넘지만 금융업을 영위할 정도로 조직화돼 있지 않다. 대안은 산업자본밖에 없다는 지적이 늘어나는 이유다. 그러나 과거 재벌의 폐해를 경험한 한국 사회는 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찬반 논란을 벌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펀드에 넘어갔던 은행의 경영권이 이제 본격적인 은행업을 영위하는 외국자본들에 넘어가는 상황이 도래했고 기업금융의 선두주자인 우리금융지주의 민영화를 앞두고 있어 이 논란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김수언·김용준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