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새해화두 "다시…" ‥ (1)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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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이데올로기 경쟁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었던 구시대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의 정치판도에서는 때늦게도 보혁의 이념정치가 재연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사회 내에는 전체주의적 좌·우 이념투쟁을 재연해야 할 이유가 없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보혁 논쟁은 차라리 시대착오적이다.
한국은 1백년 전 대원군 시절의 '소중화론'과 개화의 갈등을 오늘에 와서 반미주의 담론으로 재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도 '소중화'형 반세계화로 다시 역사에 낙오하는 민족이 되고 말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본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좌파와 우파의 편가르기를 주도한 것은 역시 좌파 패권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정희 개발독재 기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중산층이 성장했고 그 저력에 힘입어 반독재 민주화 기운이 일어나면서 소위 재야세력이 대두된 것이 저간의 경과다.
5·16 이후의 개발독재형 근대화 과정과 이에 대항했던 민주화의 흐름은 좌·우익의 대립이었다기보다는 양측 모두가 자유민주 체제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소수의 주사파 이외에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좌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념 대립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류 운동권적 발상이 조장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이 허위의식은 어떻게 자라났는가.
역시 김대중 정권의 이념적 양면성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김대중 정권은 IMF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구조조정과 지식기반 사회 등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내세웠으나 그것을 진보주의적 정서로 밀고 나갔다.
지역갈등 극복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지역감정을 역이용했고 결국 국론분열의 편가르기 정치가 되고 말았다.
지역감정은 다시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좌우이념 갈등의 소위 남남갈등으로 둔갑하는 기이한 결과가 나타났다.
햇볕정책은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한다는 당초의 명분에서는 자유주의적이었으나 김정일의 '고자세' 전술에 말려들면서 한국내의 친북 통일론과 반북 안보론의 양극화 구도를 자초했다.
오늘의 보혁 대립은 북한에 의해 역(逆) 이데올로기화된 결과다.
이 기이한 이념 갈등은 친북=진보,반북=보수의 2원구도로 단순화됐다.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한국의 좌파는 일의적으로 규정하기조차 난감하다.
지난 시절의 과도한 반공주의 풍토가 사상적 빈곤을 조성해 놓았던 결과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탈냉전의 한국정치가 자유시장 경제의 성숙에 주력해 경제 바로잡기에 전념하기 보다 대북정책에서 큰 것을 얻겠다는 정치 패권적 계책에 몰입한 결과 많은 실책을 남겼다.
IMF형 실업, 중산층의 붕괴, 청년실업, 신용카드 불량자 3백50만명 양산 등으로 우리사회는 '민생고에 허덕이는 대중사회'를 결과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는 '최후의 인간'에 대한 경고가 더 크게 강조됐다.
'최후의 인간'은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ressentiment:反感)을 가진 과평등(過平等) 심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 '대중'은 손쉽게도 포퓰리즘적 바람몰이 정치의 토양이 되기 쉽다.
오늘 우리사회의 보혁갈등은 바람정치가 만들어 낸 반시장적 정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데올로기 정치는 그 이념이 사이비 종교적 광신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종파적이며 계급 투쟁적이다.
그래서 사회를 통합하기보다는 분열로 이끄는 것이 그 속성이다.
이데올로기를 권력 기반으로 할 때 상생·공존의 정치는 사라지며 국민을 지지자와 반대자로 양분하고 더욱 그 상극이 가열된다.
결국 바람 잘날 없는 '풍파정치'가 되고 '정치의 죽음'으로 내달린다는 데 그 무서움이 있다.
문제는 보혁의 이념 경쟁이 민주공화제와 그 기본질서에 대한 합의의 기본틀 안에서 행해지고 있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서독의 정당들은 동독의 공산정권에 대해서 만큼은 확고하게 같은 편에 서있다는 기본 합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진보도 자유질서의 기본질서에서는 결코 일탈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었느냐 하는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햇볕정책을 펴면서 생긴 보혁논쟁이 친북 통일론이나 반미주의 선동,50년 한·미동맹에 대한 국론분열 과정을 통해 진보의 색깔을 드러내려 했다면 이는 심각한 체제 안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미 동맹 50년 공조관계의 기초에서 도를 넘어선 반미주의 선동이 진보의 표식은 아니다.
이는 미국의 세계적 역할에 대한 전략적 오산의 결과다.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를 편드는 듯한 온갖 색깔 이벤트는 자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친북·반미 전도사 송두율을 초대하는 따위가 운동권적 좌파 책동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의 진보가 운동권적 사고에서 탈피하려면 북한체제에 대한 명시적 비판으로 그 민주적 성격을 분명히 현시해야 한다.
'허공의 유토피아'를 그리다가 북한 체제를 그 대용품으로 삼는다면 이는 진보주의의 자해 행위와 다름 없다.
이미 실패해버리고 만 낡은 체제에 대한 향수같은 것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아직 동독 지역에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오스탈지아'가 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주사파적 '노르탈지아'(북녘향수증)가 진보 이데올로기의 고향일 수 없다.
해방 후의 좌·우익 대립과 80년대식 운동권의 망령과 씨름하는데 국력을 낭비하고 있어서야 될 말이 아니다.
근래 진보패권이 반독재 민주화의 구호를 내걸고 좌파 이외의 모든 국민을 비민주적 보수로 몰아가는 이념적 공격 표적을 설정하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55년에 걸쳐 쌓아왔던 가치체계를 배제하고 6·25전쟁관의 수정주의 등 흠집만 찾다보니 현대사를 암흑의 역사로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 시민사회가 이룩한 위대한 자유주의적 가치들, 즉 의회민주주의,복수정당제,법의 지배,자유언론,근대화와 경제번영의 위업마저 모두 부정하면서 진보의 입지를 얻으려는 왜곡된 좌파적 사관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구도 같은 낡은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다보면 이런 허무주의적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이상 작위적 허구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되겠다.
좌파 패권은 북한의 독재에도 인권에도 침묵하면서 오직 우리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흠집내고 부정하는 것으로 진보 이념을 세우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이런 잣대는 어쩔 수 없이 이념형 인간 분류에서 아마추어 선호가 되게 마련이고 결국 집권 이후 거듭 보여주었듯이 돌팔이의 오진과 오판을 범하게 된다.
시장적 사고의 결여, 행정실무의 초보운전 등이 모두 진보주의 이념 맹신의 소산임을 깨우쳐야만 한국은 다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덩샤오핑의 어법을 빌린다면 이제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구분하는 바람정치, 포퓰리즘의 정치를 종식시켜야 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티를 제창한 리오타르는 거창한 '인류의 진보' 따위의 '큰 이야기'는 그만두고 생활 주변의 '작은 이야기'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큰 이야기는 오직 국가권력 비대화를 위한 레토릭일 뿐이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이념문제가 아니라 정경유착 등 정치부패를 일으키는 권력만능의 '큰 정부'를 '작은 정부'로 바꾸는 자유주의적 처방이다.
구조조정,청년실업,이공계 기피,신용카드 불량자 35만명 등 작은 이야기를 들여다 볼 때 비로소 실질적이고도 효과있는 개혁이 이루어진다.
이런 탈이데올로기적 비전으로 21세기형 '작은 정부' 지향의 한국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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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31년 중국 상하이 출생
◇60~64 사상계 편집국장
◇63~97 고려대 교수
◇83~86 한국철학회 회장
◇92~94 고려대 대학원장
◇2002~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신채호 역사사상 연구
◇북한 주체철학 연구
◇동학사상의 이해
◇현대사회철학과 한국사상
◇시장의 철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