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2) "國格있는 선(善)진국으로 거듭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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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
"근대화 50년의 낙관론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돌아보면 선진국 진입론은 환상이었고 5대강국론은 코미디였고 경제 제1주의는 허구였다. 그런 환상 코미디 허구의 덫에서 벗어나야 이 팽배한 비관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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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심성의 변화는 낙관주의의 정착이었다.
그것은 어제보다는 오늘이,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을 것이라는 시관(時觀),신념체계였다.
오늘은 가난하지만 내일은 잘살게 될 것이고,오늘은 독재에 억압받지만 내일은 민주화될 것이고,오늘은 분단으로 고통받지만 언젠가는 통일될 것이라는 믿음,즉 단기적으로는 혹시 비관할지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낙관한다는 심성이다.
그런데 50년 만에 처음으로 이 낙관론이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자본,노동,토지,기술 등 투입요소로 보아도 또 교육,국민의욕,가치관,사회통합,정치,안보 등 그 어느 상부구조를 보아도 대한민국의 국제경쟁력을 낙관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96년 OECD 보고서가 한국이 2000년까지 G7에 포함될 것이라고 했던 예측을 비롯 95년 KDI가 2010년까지 G10,93년 KIEP가 2010년에 G7이 될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나 97년 당시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자들이 입을 맞추어 2000년대 초 5대 강국론을 합창했던 추태를 상기해보자.선진국 진입론은 확실한 환상이었고 5대 강국론은 코미디였으며 경제제1주의는 허구였다.
왜 우리가 그런 환상,코미디,허구의 덫에 걸려버렸는가를 올바로 반추해야만 비관론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4대강국과 더불어 협상하고 겨루면서 산다는 뜻이다.
이 지구상에서 4대강국과 국경을 나누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요 국가다.
압도적으로 힘이 큰 4대강국과 어깨를 비비며 살면서 생존을 담보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힘이 필요하다.
4대강국의 균형자(Balancer)가 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4대강국 모두가 한국이 자기편이 안 되면 확실히 불리하고 한국과 손을 잡으면 나머지 3국과의 세력균형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둘째,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산다는 것은 4강외교와 안보비용이 유난히 높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왜 우리보다 국력과 국부가 큰 미국,중국,러시아의 대학과 연구소에 원조를 해야 하는가.
셋째,4대강국을 상대하는 한국인들은 '반드시' 상대보다 우수해야 한다.
대통령부터 외교관,공무원,교수,군인,기업인,기술자,농민,노동자,시민에 이르기까지 4대국의 파트너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해야 그들의 압도적인 양(量)과 규모와 겨룰 수 있다.
넷째,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휴전선으로 갈라진 땅,즉 분단민족으로 산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전히 핵과 생화학무기와 선군(先軍)정치와 강성대국과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과 대적하고 있는 휴화산(休火山)에서 살고 있다.
동시에 역사기록에서도 흔치 않은 몇 백만 단위의 굶어죽는 사람과 억압의 고통에 허덕이는 동포를 구원해야 하는 사명과 열정을 억제할 수 없는 땅이기도 하다.
이 땅은 일제 침략의 역사정리도,해방 후 분단의 이산과 전쟁의 고통도 정리하지 못한 미완의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도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21세기 인류 삶의 문제군(群)의 중심에서 산다는 뜻이다.
한국이 제국주의적,패권주의적 권력 중심부에 산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의 경제대국 등장은 황해·동해 지역이 세계 제조업의 중심,물류 무역의 중심,소비의 중심,외환보유고와 FDI 즉 금류(金流)의 중심,석유수입(이미 중국 2위,일본 3위,한국 4위)과 에너지 소비의 중심으로 변모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또한 세계 최대 쓰레기 발생지역이며 공해발생 중심이며 세계 최대 인구밀집지역이며 세계 최대 대도시 밀집지역이며 인구이동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13억명,40년 뒤 16억명 중국의 경제성장과 사회해체 과정은 필경 지역의 문제를 넘어 인류사회 전체의 생존과 삶의 문제로 변환된다.
길게는 르네상스 이후 5백년,짧게는 산업혁명 이후 2백30여년 만에 '근대화'가 중국과 인도라는 최대 인구대국에서 연소하면서,즉 '근대화의 세계화'가 완성에 이르면서 근대화를 넘는 새로운 문명질서를 탄생시킬 수밖에 없는 그런 미래의 땅,그런 인류공동체 삶의 문제군의 핵심지역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선(善)진국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부자가 되기 위해,또는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존심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이 땅에,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다 보면 선진국 수준의 질이,그만한 격(格)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올해 그리스 아테네에서 1백주년 기념 올림픽이 열린다.
그리스는 민주주의와 올림픽이라는 빛나는 전통을 가졌고 세계적인 엘리트도 많지만 아무도 오늘의 그리스를 선진국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이 가는 길은 아르헨티나의 길이기보다 그리스의 길로 보인다.
일부 글로벌 엘리트(백남준,조수미,박세리,보아,황우석,…),일부 글로벌 기업은 있으나 나라 전체로는 사회통합,정치신뢰,국가안보에 실패함으로써 선진국의 꿈은 접고 근근이 살아가는 나라.그리하여 역사의 한(恨)은 계속 연장되는 민족.
영국이 시민혁명 산업혁명을,프랑스가 공화정 혁명을,미국이 민주주의 혁명을,일본이 메이지유신을,스위스가 세계적십자 운동을 창시했듯이 한국은 '한국혁명'을 창조해야만 이 땅에서 사는 의무,즉 '선(善)진화'를 다하는 것이다.
선진국이되 양(量),규모(規模),경(硬),강(强)의 힘에서가 아니라 질(質),격(格),연(軟),선(善)의 힘으로 선(善)진화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스위스가 적십자운동이라는 휴머니즘의 세계평화운동을 펼쳐 자국의 안보를 지켰다면 우리는 20세기,아니 근대제국주의의 가장 비극적 산물인 휴전선을 단순히 남북한 평화선을 넘어 세계평화선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한반도의 안보와 21세기 한국 민족주의를 정립할 수 있다.
반미(反美),반일(反日),반중(反中),반러시아가 아니라 이 땅에 강력한 친미,친일,친러 세력이 있으되 이들이 모두 한국 민족주의와 세계 보편적 평화에 수렴할 수 있는 그런 아량,관용,희생의 인격,즉 국격이라야 할 것이다.
한국,중국,일본,북한의 15억 인구가 안전하게 2030년까지 근대화를 넘기려면 더 이상 소비가 미덕이고 탐욕이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절제가 미덕이고 생(省)소비가 보람이 되어야 한다.
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인구밀집 지역에서 15억 단위의 거대규모가 최고속의 근대경제성장을 한다는 것은 넓은 땅,작은 인구,2백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진행해왔던 서양의 근대화를 그대로 복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근대 이전을 사람값보다 상품값이 비싼 시대로 정의한다면 근대는 사람값이 상품값보다 비싼 시대를 말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는 상품값보다 사람값보다 자연의 값이 더 비싼 시대가 전개된다.
앞으로는 자연을,환경을 지키는 기술과 시스템, 위험사회를 예방하는 기술과 시스템이 공업제품,감정상품(entertainment)의 부가가치보다 훨씬 높은 연성(軟性)사회가 온다.
이 땅에서 질과 격이 높은 연성사회 선(善)진국을 만드는 것,그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이요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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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36년생
◇1958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1972년 미국 하버드대 니만펠로
과정 수료
◇1958~1980년 동아일보 기자
편집국 부국장
◇1990~1993 과학기술처 장관
◇1995~1999 서울시립대 총장
◇1994~1996 한국경제신문 회장
◇2000~2001 문화일보 회장
◇1999~ 장준하기념사업회 회장
◇2001~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한국경제학의 제문제(공저)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
◇한인-삶의 조건과 미래(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