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열며] 남극의 과학영웅 .. 朴星來 <한국외대 교수·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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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과학도 전재규군이 남극에서 조난해 목숨을 잃은 지난해 말.세계 언론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 1백주년을 기념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러시아 항공우주국은 우주 결혼 상품을 개발해냈다고 발표했다.
이들 세 기사를 두고 나는 몇 가닥의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셋 모두 위험하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라이트 형제는 정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비행기를 개발해 실험했다.
당시 많은 비슷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고 여러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 결과 지금 인간은 거의 두려움 없이 항공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당연히 비행기 발명은 인류 역사상 대사건으로 기념되고,라이트 형제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영웅이 됐다.
그에 비하면 남극의 세종과학기지는 그렇게까지 위험한 경우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조난사고는 언제든 다시 생길 수 있고,그것은 또 다른 희생을 낳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조난당한 한국의 젊은 과학도는 "남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남극생활을 경험하고 싶어서" 그곳에 갔다.
말하자면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남극에 갔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 그의 용감한 남극 진출이 그에게 라이트 형제의 명예를 갖다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참가하고 있던 과학 탐구의 결과가 즉각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그런 업적으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러시아의 우주 결혼은 또 어떤가? 역시 위험할 것은 분명하다.
결혼할 한 쌍은 우주선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결혼식을 하고 또 10일간의 우주여행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위험한 푼수치고 이 사건은 남극과학기지만큼도 인류사에 기여할 것이 없는 사소한 일일 뿐이다.
이 행사는 미국의 한 이벤트 회사가 주관하는 것으로 그 참가비용이 4백80억원(미국 돈으로 4천만달러)이라고 한다.
누가 이 엄청난 돈을 내고 이 행사에 참가할지도 의문스럽지만,그런 사람을 세계가 영웅으로 대접할 까닭이 없다.
생각해 보면 역사는 점점 영웅을 잃어가고 있다.
영웅 또는 위인이란 역사적 대사건의 주인공으로 그 사건 가운데서 저절로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는 더 이상 개인을 그런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세계화와 민주화가 진행될수록,인간 하나하나는 사소한 존재가 돼 더 이상 역사의 주인공 자격을 갖기 어려워진다.
그 대신 나타나는 것이 대중의 명사들(연예·스포츠 스타)이다.
4백80억원을 내고 우주 결혼을 하는 사람 역시 이 반열에는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반짝 인기를 먹고 사는 이들은 이렇게 큰 돈과 연결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의 주인공과는 상관이 없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정치가와 군인 가운데 역사의 영웅을 찾아 존경하곤 했다.
그리고 과학기술자나 문화예술인 등을 그에 버금가는 '큰 사람'으로 꼽은 적이 있다.
라이트 형제 정도가 바로 인류 영웅사의 끝자리를 차지한다.
더 강한 이미지를 찾자면 아마 그 직후의 아인슈타인 정도를 '마지막 영웅'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어차피 이렇게 역사는 영웅의 자리를 없애고,그 대신 명사를 만들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된 남극 조난사고를 이벤트로 만들어 청소년들의 도전 정신을 일깨울 수는 없을까?
한국해양연구원은 1988년 이래 남극의 세종과학기지에 해마다 16명 정도의 상주연구원을 파견하고,재작년부터는 상주연구원은 없지만 북극에도 다산과학기지를 두고 있다.
'전재규 도전기금'을 만들어 해마다 10명 정도의 젊은 연구원들을 이런 고립된 상황에 파견해 1년씩 연구하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극한 상황에서의 기상,지질,생물 등 과학적 연구뿐만이 아니라,젊은이로서의 극기(克己)와 도전(挑戰) 정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회는 꼭 과학도에게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 모두에게 그런 정신은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생각돼 하는 나의 제안이다.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