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비준에 대한 국회 동의가 지난해 말에 이어 지난 8일 다시 무산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제화 수준이 또 한번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93년 UR(우루과이라운드)타결 이후 무한경쟁과 단일시장으로 특징 지어지는 세계경제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는 이 흐름과 조화되는 나라운영,경제운용 측면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국가적 규모의 경제위기를 겪음으로써 국제화의 흐름과 괴리된 '우리 식'경제운용,기업경영을 해온 대가를 단단히 치렀음에도 말이다. 농업정책은 UR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이런 '우리 식'경제운영의 대표적 분야다. 우리의 농업과 농촌이 갖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회피하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보다는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호도하거나 핵심에의 접근을 유예하는 등 인기영합주의가 이 분야의 정책방향을 지배해왔다. 국제가격과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구조개선을 근본적으로 유도하여 개방의 확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쌀을 비롯한 농산물 가격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간 농산물 가격정책은 이런 방향과 전적으로 역행하는 것이었고 지난 10년간 70조원 이상의 농업구조개선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농업의 경쟁력 향상과 구조개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의문이다. UR이후 농업부문에서 '잃어버린 10년' 세월의 절반이라도 건졌더라면 오늘 우리나라가 국제화 목표에 비추어서 너무도 늦은 최초의 FTA 하나 가지고 이렇게 온 나라가 소동을 벌이고 상대국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고 세계의 주목거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분야인 외환 수급 및 환율 관련 정책을 보자. 외환위기를 겪고도 이 분야는 시장원리나 국제적인 흐름과는 크게 괴리된 방향으로 운영되어 왔다고 본다. 국내경기의 진작을 위해 이들을 주요 정책변수로 활용한 대내균형 우선의 사고가 관련 정책방향의 근저에 있다. 아마도 금년도 경제운영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점은 우리식 외환, 환율정책에 대한 미국 등 바깥 세계의 문제 제기와 그로 인한 국가간 갈등이 될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지 않은 채 또 이로인한 우리경제의 구조조정 가능성의 상당부분을 외면한 채 언제까지 마이 웨이(my way)를 계속할 것인지? 시장원리에 적합하고 국제적인 흐름에 동승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경우 이런 갈등은 해소되겠지만 일시적인 수출 경쟁력 약화와 성장의 후퇴는 불가피할 것이다. 정부로서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될 것이다. 지금 세계는 한 나라의 경제운영방식과 세계경제의 흐름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 유형의 나라들로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다. 대외균형과 대내균형이 충돌할 때 대내균형을 우선하는 나라,어떤 부문의 개방이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자국이 해외에서 획득할 새로운 시장에는 주목하지 않고 이로 인해 잃을 국내시장에만 집착하는 나라,전체 국익과 부문별 이익이 충돌할 때 후자가 정책결정의 기준이 되는 나라,개방이 불가피하고 대세가 되고 있을 때에도 이런 기회를 관련 국내 산업의 구조조정의 호기로 활용하지 못하는 나라,국제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해관계 집단의 목소리만 들리고 이에 대한 바른 방향을 정립하고 이들에 대한 설득과 교육 기능을 포기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나라운영을 하고 있는 나라,그 어느 나라도 경쟁력 있는 경제를 운영해가는 경우가 없다. 반대의 경우는 예외 없이 세계시장의 승자가 되고 있다. 칠레와의 FTA체결 문제는 협정 내용이 갖는 의미나 영향을 넘어 우리나라의 국제화 수준과 의지 그리고 대외정책의 신뢰성이 세계시장에서 시험당하는 결정적 기회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 국민과 정부는 우리나라가 어떤 유형의 나라에 속할 것인지를 분명히 선택해야 된다.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선진국 줄'에 분명하게 설 것인지, 아니면 쉬운길을 걸으면서 선진국 되기를 포기할 것인지. ihkim@shin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