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홈쇼핑에서 이민상품이 매진돼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민 가면 국내에는 일자리가 하나 생기지만 기업 하나가 나가면 수백, 수천개의 일자리가 사라집니다." 지난해 말 김진표 경제부총리 초청 기업인 간담회에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한 얘기다. 박 회장은 산업공동화 현상의 심각성을 역설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제조업 기반 약화에 따른 실업난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거리에는 청년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구조조정 한파로 생업에서 밀려난 40,50대 가장들이 즐비하다. 이런 터에 노무현 대통령이 14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올해는 일자리 만들기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밝히자 정부가 무언가 새로운 방안을 들고 나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일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당장 공공근로 확대 등을 통한 선심성 정책이나 기업들의 인턴사원 채용 유도와 같은 '일 나누기(job sharing)'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일회성 고용 창출로 실업률 통계치는 낮출 수 있을지 몰라도 "일자리야말로 진정한 복지"라는 노 대통령의 수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정진석 국민대 교수는 "정부가 당장 해야 할 일은 해외로 떠나는 기업들을 붙잡는 것"이라며 "고용의 주체인 기업들이 줄줄이 한국을 탈출하는 상황에서는 일자리가 늘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이같은 지적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지난 2002년 기업들의 해외투자는 1천8백건으로 지난 94년(1천건)에 비해 1.8배 늘어난 반면 2003년 제조업 분야의 일자리 수는 4백16만개로 90년(5백4만개)에 비해 88만개나 줄었다. 삼성그룹의 경우 지난해까지 중국에 26억달러 상당을 투자하면서 현지에 4만5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 LG전자 역시 15억달러의 투자에 3만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채용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 기업들이 현지에서 만들어낸 일자리는 어림잡아 1백만개가 넘는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부가가치가 높고 고용유발 효과가 큰 사업들이 속속 해외로 이전할 채비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가전 반도체 초박막 액정표시장치(TFT-LCD) 등의 생산시설을 이미 중국에서 가동하고 있는데 이어 PC 제조시설도 내년까지 중국으로 완전 이전키로 했고,현대자동차는 중국 미국 동유럽에 잇따라 연산 30만대 이상의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거나 부지를 물색 중이다. 포스코는 냉연강판 컬러강판 등 고부가 제품의 중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고, 대우종합기계와 현대중공업은 공작기계 건설중장비 등 주력 제품의 해외 생산을 늘리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해외 이전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가 3백75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30.7%의 기업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옮기겠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각종 기업 규제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고 노사관계가 '세상을 바꿔보자'는 구호에 휩싸여 파행을 달리는 구조 속에서는 이같은 '한국 탈출'을 말리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렇게 떠나는 기업들의 속사정은 글로벌 경영을 위해 해외에 투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계기업들이 해외로 떠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떠나지 말아야 할 기업마저 엑소더스 행렬에 들어서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며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규제완화,노사관계 안정 등의 투자환경 개선은 기본이고 우리나라가 국제 비교 우위를 살릴 수 있는 부품 소재산업의 네트워크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정태 한국경영자총협회 상무는 "해외로 떠나는 기업만 잡아도 연간 8만~9만개의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구학ㆍ조일훈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