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내부 갈등은 국익만 해친다..安世英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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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술은 많이 마시지만 알코올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낮술 안 마시고 안주 없는 깡술 안 마시고 마지막으로 직장 동료들끼리 모여 상사 험담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같이 권위적인 직장생활에서 퇴근 후 끼리끼리 모여 한 잔 하며 윗사람을 씹는(?) 즐거움이 없으면 사회적 스트레스도 커지고 건설적 비판도 나올 수 없다.
이는 회사원뿐만 아니라 관료에게도 마찬가지다.
서슬이 시퍼렇던 군사정권에서도 정부 청사 주변 술집에선 대통령과 청와대 보좌진이 전통(全統)으로 시작해 '무식한 군바리들'로 난도질당했다.
그런데 세상이 밝아진 민주정권에서 권부를 비난한 일부 외교관료들의 언행이 문제가 돼 급기야 외교부 장관의 사퇴로까지 이어졌다.
사실 처음에는 통치권과 외교부 간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려니 했는데 이제 그만 국민적 관심사가 돼 버렸다.
우선 이번 일이 국가정책 방향에 대해 건설적 비판을 하려는 엘리트 관료들의 입에 족쇄를 채우지 않을까 우려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특별 권력관계에 있는 공무원은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해선 안 된다.
하지만 때론 내부회의나 사석에서 정책의 옳고 그름에 대해 쓴 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대미(對美) 협상과 같이 일부 청와대 보좌진과 정통 외교관료 사이에 '무엇이 국익인가'를 놓고 의견이 다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워싱턴에서 미국 관리와 협상을 하다 보면 '클린턴 따라 다니다 백악관에 들어앉은 아칸소 촌놈들 때문에 못해 먹겠다'는 투정 정도는 흔히 듣는다.
다음으로 이번과 같은 어리석은 내부 갈등의 표출은 앞으로 우리의 대미 협상력을 상당히 약화시킬 것이다.
북핵과 주한 미군 재배치같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협상 도중에 이 난리를 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누가 대미 협상 테이블에 앉든 고개는 국익이 아닌 청와대 쪽에 돌리고,미국은 우리의 이 같은 약점을 마음껏 이용하려 들 것이다.
또 한 가지 떨칠 수 없는 의문은 왜 조용히 처리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북미국은 모두가 가보고 싶어 하는 외교부의 꽃이다.
이들의 언행이 진짜 문제가 된다면 소위 말하는 냉탕 해외공관으로 슬며시 내보내 버리면 된다.
그런데 지금 보이고 있는 요란한 대처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미숙한 국정 경험 때문이든지,아니면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일부 친미 성향의 외교관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만약 이번 사건이 소위 말하는 자주외교파와 한·미동맹파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면 이는 국민이 용납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할 불신풍조다.
이제부터 어떻게 직장동료와 마음 터놓고 술 마실 수 있겠나? 상사 비난하는 말을 했다간 언제 누가 고자질해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는데.만약 익명 투서를 가지고 이 야단을 떨었다면 앞으로 온갖 투서가 청와대에 쇄도할 것이다.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직장 동료를 모함하는 허무맹랑한 내용이 대부분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선 다양한 평가를 한다.
하지만 아랫사람들의 거슬리는 충언에도 귀를 기울이는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지도자라는 데는 모두가 의견을 같이 해왔다.
이번 일로 그런 대통령의 좋은 이미지가 퇴색되지 않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나라 관료조직은 부처 할거주의,자기보호 본능 등과 같은 때묻은 면도 있지만 국가 발전에 대한 소명의식과 충성심,그리고 국정 운영의 전문성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청와대 보좌진보다 우수할지도 모른다.
진정 스스로의 평소 이념을 국정에 실현하고 대통령을 잘 모시려면 관료조직의 등에 올라타야 한다.
엘리트 관료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신나게 국정의 가도를 질주해야지 이번 사태처럼 관료들과 티격태격해 국민을 불안하게 해선 안 된다.
관료조직과 등을 돌리고 성공한 정권은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마지막으로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