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이한빈 부총리의 악역 .. 주태산 <맥스무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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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ts@maxmovie.com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정부는 두 가지를 항상 넉넉히 마련해야 한다.하나는 식량이요,또 하나는 땔감이다."
대만 장경국 총통의 말이다.
이한빈 아주대학장은 장 총통의 치국론이 가장 절실히 와닿던 1979년 12월 경제부총리에 취임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최악이었다.
성장의 후유증은 손대기 힘들 정도였다.
정국은 10·26사태로 소용돌이치며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위기 요인의 복잡성으로 보면 1997년 말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하의 외환위기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그 해 물가상승률은 23.8%나 됐다.
경상수지는 41억5천만달러 적자를 기록하여 전년 대비 4배였다.
국제금리가 가파르게 올라 이자 부담은 커지는데 대외신인도가 급락하여 신규 차입이 거의 불가능했다.
외환보유고는 고갈 직전이었다.
국가 파산을 우려한 일본계 은행들은 자금 회수에 나서고 마산 수출지역에서 사업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속속 짐을 꾸렸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더니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가를 4배나 인상했다.
제2의 오일쇼크였다.
국내 기름 재고는 불과 7일분이었다.
이 부총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출 촉진을 위해 환율을 인상하고, 물가 억제를 위해 금리를 올리며,민생 안정을 위해 재정지원을 확대해야 했다.
정책간 상충이 우려되고 국민 고통을 담보해야 하는 고강도의 복합 처방이었다.
이 부총리는 "극복되지 않는 난관은 없다"며 정면 돌파키로 했다.
모든 것이 판단 유보였던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체제하에서 악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1980년의 1·12조치를 통해 환율과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유가도 60% 가까이 올렸고,전기요금과 독과점 품목의 가격인상도 허용했다.
이런 '현실화 정책'으로 인해 쏟아지는 국민적 저항과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IMF와 세계은행은 "한국이 오일쇼크를 겪는 국가 중에 가장 교과서적인 조치를 취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1980년을 넘기면서 한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설 연휴에 들려온 갑작스런 이 전 부총리의 부고 소식에 묻고 싶어진다.
지금 식량과 땔감은 넉넉한가.
서민들은 풍족한가.
그게 아니라면,국가적 난제들을 온몸으로 돌파하려는 소신 있는 정부 각료들은 있는가.
삼가 그의 영전에 조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