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홍매화는 피어있는데 .. 권지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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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 앞바다의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였다.
새삼스레 반가웠다.
나는 며칠째 이 섬에 들어와 육지와 떨어져 지낸 터였다.
뉴스도 인터넷과도 떨어져 있었다.
요즘엔 인터넷이 없는 곳도 섬일텐데,나는 정말 완전한 섬에 있는 거였다.
반갑게 친구와 이런 저런 통화를 하다가 나는 건성으로 육지엔 뭐 별일 없냐고 물었다.
친구는 누군가가 자살했다고 말해주었다.
수뢰혐의를 받고 있는 부산시장이 구치소에서 목을 맸다고 했다.
좀 전까지 나는 해변의 동백꽃에 흠뻑 취해 있었다.
감귤 속살같은 햇살에 바다는 더욱 짙푸르고 앞바다의 범섬도 그리 외로워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육지로부터 날아온 그 풍문 때문일까.
볕바른 양지쪽엔 벌써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이 모가지를 툭 꺾은채 송이째 땅에 떨어져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동백은 필 때보다 오히려 질 때가 더 인상적이다.
참수당한 듯 툭 떨어진 선연한 핏빛 꽃송이.
아아 또 누가 죽었구나.
인간이 스스로 목을 매기까지에는 얼마나 절박한 고통이 있었을까.
망망대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홀로 있는 것처럼 외롭고 막막했을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작년부터 유난히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자살 건수는 전년에 비해 6.3% 늘어난 1만3천55건으로 하루 평균 36명꼴이며 시간당 1.5명꼴이라고 한다.
대기업 회장의 자살이나 생활고에 시달린 주부가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동반 투신한 사건은 아직까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일종의 자살 신드롬으로 진단하며 우리 사회를 우려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사회 지도층 인사든,고위 공무원이든,서민이든 이들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요인은 거의 대부분 '돈'이라는 점이다.
카드 빚에 몰려 죽음을 택하는 서민이나 받을 돈이 아닌 걸 받은 정치인이나 그걸 정치인에게 준 기업가나 모두 돈 때문에 죽는다.
우리 사회에 독가스처럼 퍼져있는 이 물질만능주의를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고 더 가난한 사람이 죽는가.
더 많이 받은 정치인이 죽는가.
문제는 금액이 아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으로 작용했는가일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한 시절,보릿고개로 영양실조에 걸렸을 때도 우리는 죽지 않았다.
문제는 '상대적' 빈곤감이나 박탈감,상실감인 것이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의 앞바다에는 중죄인들만 수감하는 지옥같은 감옥으로 유명한 알카트래스 교도소가 있다.
그 곳의 밤추위는 가히 살인적이라고 하는데 이 곳이 지옥 같은 감옥이라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언뜻 보면 알카트래스는 휴양지처럼 보인다고 한다.
창으로 아름다운 항구도시를 끼고,금문교가 보이고,2층으로 만들어진 베이교가 걸린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감생활을 한다면 호사스러운 감옥생활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수인들은 지척의 황홀경을 보며 자신들의 불행을 더욱 곱씹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리라.
아마도 '천국이 보이는 창문을 가진 지옥'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지옥이 아닐까.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면 물론 복지 시스템이나 경제정책이 중요하다.
그러나 따뜻한 이웃,세심한 가족의 마음 씀씀이가 오늘도 벼랑 끝에 서서 죽음의 유혹에 번민하는 한 생명을 품을 수 있다.
생명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 것인가! 가끔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생명을 갖고 있는 인간인가를 좀 느끼며 살 수 있는 풍토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후엔 민속촌을 둘러보았다.
볕바른 제주 초가 돌담 곳곳에 동백꽃뿐 아니라 목련봉오리도 내 새끼손가락만큼 올라오고 있었다.
입춘대길이라 방을 써 붙인 어느 집 대문을 들어서니 겨울을 이긴 홍매화가 수줍은 자태로 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춘이었다.
아아 봄이다.
생명이다.
삭막한 추위를 견뎌내고 다투어 피는 이 봄꽃들은 저마다 얼마나 어여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