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국회는 9일 한·칠레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을 또다시 무산시켰다. 지난해 7월 상정된 이래 세 번째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꼼짝없이 '늑대와 양치기 소년' 신세가 됐다. 협정 상대방인 칠레에 '이번만큼은…'이라고 장담했으나 번번이 부도수표로 끝났다. 칠레 상원은 지난달 22일 그 동안 미뤄두었던 FTA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2월9일 본회의에서는 꼭 통과될 것"이라는 한국 정부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권을 동원해서라도 처리할 것이라던 국회의장의 다짐까지 믿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터다. 비준이 또 틀어졌다는 소식에 "칠레 정부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주(駐)칠레 대사의 노래진 얼굴은 국제사회에 비춰진 '통상 한국'의 반사경일 수밖에 없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렀으면 문제의 본말과 책임 소재를 엄격하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1차적인 책임은 물론 국회가 져야 한다. 60여명의 농촌 출신 의원들은 앞선 두 차례의 본회의 토론에서는 '칠레는 세계 3대 농업대국' 따위의 잘못된 선전전과 함께 막가파식 몸싸움으로 판을 망쳐 놓았고,엊그제 본회의에서는 투표 방식을 시비삼아 딴지를 걸었다. 말로는 "국제통상의 도도한 흐름을 손바닥으로 막을 수는 없다"던 다른 의원들이 이런 활극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그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걸 우리는 숱한 경험을 통해 잘 안다. FTA 못지 않게 중요한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야당도 아닌 여당에 의해 무산된 판국이니까. 코앞에 닥친 총선을 앞둔 그들에게 '국익'보다 중요한 것은 '떨어지는 나뭇잎도 피해야 하는' 말년 병장의 수칙일 터다. '국제 망신'의 책임을 송두리째 국회에 떠넘기고 있는 정부가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아니었는지도 따져볼 일이다. 2002년 10월에 타결된 협상을 9개월이나 지난 작년 7월에야 국회에 상정한 것부터 그렇지만,과연 FTA 비준을 위한 '총력 설득'을 제대로 폈는지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 지난 주말 국무총리가 각계 원로들을 초청해 점심을 먹으면서 'FTA 통과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한 것은 전시행정의 극치였다. 우리 사회가 어디 원로들 말을 듣는 곳인가. 나이 지긋한 추기경이 '반미 정서'를 걱정했다가 '과대포장된 노인의 허언(虛言)'이라는 식의 매도를 당하는 시대다. 진심으로 나랏일을 걱정하고 책임지는 정부라면 매맞을 각오를 하고 반대 농민단체 속으로 파고들어 토론하고,설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정부의 그런 노력이 충분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따지고 보면 중우(衆愚)정치와 참여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 정부의 시스템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근본 원인일 수도 있다. 새만금과 부안,사패산에서 운동 에너지를 충전한 일부 운동단체들이 정치판에까지 뛰어들어 국회의원들의 당락을 좌우하겠다고 덤벼드는 시대다. 똑같이 당적을 갈아치웠더라도 특정 당으로 옮긴 사람은 괜찮고,다른 경우는 낙천 대상이라고 우기며 '운동 권력'을 휘두르는 데도 대통령은 "장려돼야 한다"고 거드는 상황에서 생업이 걸린 농민들의 반대 기세를 꺾을 수는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괜히 중뿔나게 FTA 통과에 총대를 멨다간 4년간의 '의정 장사'를 한 순간에 망칠 걸 걱정했을 의원들이 차라리 안쓰럽다. 이익집단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 놓은 '오도된 참여민주주의'가 딱할 따름이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