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을 볼모로 한 정치권이 '통상 한국호(號)'의 방향타를 거꾸로 돌려 놓고 있다." 4월 총선에서 농민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몸사리기'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이 또 다시 무산되자 각계 전문가들은 정치권에 발목 잡힌 통상정책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FTA 추진을 통해 구호에 머무르고 있는 '열린 통상국가'로의 물꼬를 트고 이익집단과 정치논리가 경제를 압도하는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들은 또 올해 도하개발 아젠다(DDA) 협상과 쌀 재협상 등 농업 개방 일정이 줄줄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한·칠레 FTA를 농업 구조조정의 전환기로 삼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정치권에 촉구했다. 한덕수 산업연구원장(KIET)은 "FTA 협정 타결을 맺어 놓고 1년 넘게 발효를 못시킨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며 "일부 농촌 출신 의원들이 요구하는 농촌 지원 추가 대책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완돼온 것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외교적 망신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정치권이 우선 FTA 비준안을 통과시킨 후 추가 대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정환 농촌경제연구원장은 "한·칠레 FTA로 인한 피해로 이 자체로 우리 농업 기반이 무너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며 "비준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농업 구조조정의 기회는 더 멀어지므로 각 정당 지도부의 합리적 의견 조율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도 "국가 경제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대승적 차원에서 정치권의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농업단체로는 처음으로 FTA 지지 서명을 밝힌 전국농민단체협의회의 최준구 회장은 "일부 급진 성향 농민단체의 의견을 전국 농민의 주장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며 정치권의 소신있는 판단을 촉구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는 "공개적 표대결을 통해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성숙한 정치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충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KIEP)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통상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을 주도하는 정당과 국회의원들이 오는 4월 총선에서 오리려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