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고 그래서 농업 갈등이 가장 작을 것이라는 이점(?) 때문에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파트너로 선정됐던 나라가 바로 칠레였다.


여기에 쌀 사과 배는 협상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고 포도마저도 겨울철(11~4월)에 한해 높은 관세를 매겨 수입하기 때문에 농민 반발은 거의 없을 것이라던 한ㆍ칠레 FTA는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단 한 건의 FTA협약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쌀시장 개방, 미국과의 투자협정,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등 밀려드는 국가적 과제들을 과연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


대외통상 무능국가요, 불임(不姙)국가라는 비난이 제기되는 가운데 개방국가로서 국가의 정체성까지 의문시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 한국의 현주소다.


농민표를 의식한 농촌 출신 국회의원들의 격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한ㆍ칠레 FTA는 지난 9일 결국 국회 비준절차를 넘어서지 못했다.


한ㆍ칠레 양국 정부가 지난 2002년 10월 FTA안에 서명한 뒤 1년4개월을 소모하고서도 또다시 비준안 처리를 연기하는 무책임으로 한국의 대외신인도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됐다.


지난해 상반기에 이미 국회를 통과했어야 할 FTA 비준안이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각종 '원점에서 재검토' 바람에 휩싸이면서 농민 등 이익단체들의 반발을 증폭시켰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코앞에 둔 지난해 12월에야 상임위를 통과한 것은 정부의 '전략 부재'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역의존도가 국내총생산(GDP)의 60%가 넘는 나라가 개방을 포기하고 국수주의에 매몰될 경우 그 결과가 어떨지는 불문가지다.


FTA뿐만 아니라 이라크 파병안이 처리되지 못한 것 역시 일부 시민단체와 무정견의 여당이 국가의 결정을 저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지적이다.


사회집단의 기대수준이 한껏 높아진데 반해 정부의 갈등 해소 능력은 오히려 마비상태로 치달은 것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


정부는 한ㆍ칠레 FTA 비준문제도 그렇지만 목전에 다가온 각종 국가적 현안과 관련,국정운영의 목표와 전략 모두를 치밀하게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 여당의 획기적인 자세전환이 시급해졌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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