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민태일 <포도생산자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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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하는 농민들 중에서도 6만5천여 포도생산자들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칠레는 세계 포도시장의 24%를 점유할 정도로 값 싸고 질 좋은 포도수출국으로 정평이 나 있고 포도주 경쟁력 역시 프랑스와 경쟁할 정도여서 협정이 맺어지면 국내 포도생산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협정의 국회 비준이 미뤄지고 있지만 대세는 이미 결판난 상황이어서인지 11일 국내 3대 포도 주산지중 하나인 충남 천안의 입장농협에서 기자와 만난 민태일 한국포도생산자협의회 회장(67ㆍ입장농협조합장)은 풀이 죽어 보였다.
민 회장은 개방 자체보다 정부의 농정과 통상정책에 대해 불만이 컸다.
"UR(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정치 눈치 등을 보느라 농업 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뤄오던 정부가 갑자기 '열린 통상정책'을 내걸고 FTA를 추진하는 것은 직무유기일 뿐 아니라 농민에겐 전쟁을 해보지도 않고 백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무조건 FTA는 안된다는게 아닙니다. 농민들이 준비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고 관세를 '제로'로 가져가는 과격한 시장 개방을 추진하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민 회장은 "한국이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국내 농업시장을 많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쯤은 농민들도 알고 있다"면서 "오히려 정부가 농촌 민심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해 농업시장 개방을 최대한 늦출 것처럼 연막을 쳐온게 문제"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정부의 열린 통상정책도 일관성이 없다"면서 "현 정부가 자생력이 약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스크린쿼터제 등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힘 없는 과일재배 농가를 방패막이로 국제통상 무대에서 체면치레를 하려고 들고 있다"고 강변했다.
"정부의 FTA 협상은 사실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DJ정부 당시 'IMF 졸업 우등생'이라는 국제사회의 평가를 의식해 한국과 교역 규모가 작은 칠레를 선택한게 화근이지요."
"하지만 정부의 판단과는 달리 칠레는 세계 과일시장에서 포도 24%, 키위 17%, 배 17%, 사과 7.6%를 각각 점유, 한국 과수농가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수출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역설한 그는 "교역 규모가 작다고는 하지만 특히 칠레의 포도 같은 과일이 무차별 쏟아져 들어온다면 일거에 한국 재배농가를 궤멸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통상협상 전략에도 불만이 많다는 민 회장은 "WTO(세계무역기구)의 쌀시장 개방 협상을 앞두고 있는 나라가 이에 앞서 세계적인 농업국가(칠레)와 농산물 관세를 '제로'로 만드는 FTA를 체결하는 것은 상대편(농산물수출국)에 '카드'를 전부 보여주고 포커를 하는 꼴이 아닌지 관계 공무원들에게 묻고 싶다"고 말했다.
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한ㆍ칠레 FTA 체결과 과수농업'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과수농가의 소득 감소는 올해 30억원을 시작으로 오는 2010년에는 4백5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 계절관세를 10년간 철폐하는 데 따른 포도재배 농가의 소득 감소는 연간 30억원에서 시작해 관세가 점차 낮아짐에 따라 5년 후에는 1백억원 수준을 능가한다.
민 회장은 "포도재배 농민들은 이미 지난 96년부터 수입 포도가 유통된 이후 엄청난 가격 하락을 경험했다"며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지난 10여년간 말로만 농업 혁신을 부르짖었지 그 동안 도대체 정부가 해놓은게 뭐냐"고 항변했다.
정부는 '세계로 열린 통상국가'라는 모양새를 갖추려 하지 말고 수입 과일과 가격경쟁을 위해 연구개발 및 기술보급, 시설비 지원, 폐원농가 보상제도 마련 등 구체적인 살길을 제시해 달라는게 농민들의 요구라고 그는 강조했다.
이를 위해 농협 무이자 자금 융자 등 포도 고급화에 대한 지원, 포도주 등 가공산업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농민주' 형태의 면세 판매 등을 허용해 경쟁력을 확보해 주는 방안도 강구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경험상 시설포도값이 폭락하면 노지포도도 영향을 받는 만큼 노지포도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천안=백창현 기자 chbai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