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거짓말 할 권리는 충분히 있다.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내 개인적인 문제에 관해 선의가 아닌 단순한 호기심에서 질문할 때 거짓말로 응수해도 무방하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이 말은 배동현 감독의 로맨틱코미디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출발점이 된다. 일상에 넘쳐나는 허위와 거짓이 초래할 수 있는 개인적인 위기상황과 그것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낙관주의를 담은 소극(笑劇)이다. 액션과 욕설이 배제된 이 드라마는 시트콤처럼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잔잔하게 보여줘 관객들을 미소짓게 한다. 영주가 같은 기차에 동승한 시골약사 최희철(강동원)과 오해로 인해 악연을 맺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자신의 가방을 그가 가져간 것으로 판단한 영주는 희철의 가짜애인 행세를 하면서 그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천부적인 사기꾼 영주 앞에 순진한 희철과 그의 가족은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주의 마성은 희철의 가족이 보여주는 사랑에 잠식당한다. 교활함을 이기는 무기는 역시 애정이라는 것이 주제다. 주인공 주영주(김하늘)는 만사를 능수능란한 거짓으로 대처하는 사기전과자로 설정됐지만 사실 평범한 여성이다. 그녀는 일상의 미묘한 상황에서 주로 거짓을 선택하다 보니 '진실을 말할 때 얼굴이 붉어지는'특성을 지니게 됐다. 영주와 자주 대면하는 할머니는 편견없는 시각의 소유자다. 할머니는 치매증세로 인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응대함으로써 영주에게도 소속감을 갖게 한다. 영주가 우여곡절 끝에 희철의 가짜애인에서 진짜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전개는 '거짓에서 출발해 진실에 이르는' 소비사회의 보편적 인간관계의 한 단면이다. 다른 사람 모르게 은밀한 사랑을 키워 공개된 관계로 발전하는 로맨틱코미디의 정석에서는 한 걸음 비껴 서있다. 줄거리는 미리 정교하게 짜여진 상황에 인물들을 투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캐릭터가 여러가지 가능성 중 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빚어내는 해프닝들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연출됐다. 김하늘은 '밝고 건강한 사기꾼'을 무난하게 연기했고 강동원은 순진함을 촌스럽지 않게 표현했다. 20일 개봉,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