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국회에서 세차례나 무산된 뒤 16일 열린 본회의에서 가까스로 통과됐다.


세계에서 FTA를 체결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통상 외톨이'라는 오명(汚名)에서는 간신히 벗어났으나 이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와 국회의 무능력, 국제사회의 신뢰 상실,농민 등 이해집단의 반발을 돈으로 막는 나쁜 선례 등은 두고두고 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국은 올해 국회의원 총선거 등 정치이슈들과 한ㆍ일 및 한ㆍ싱가포르 FTA, 쌀시장 재개방 협상,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아젠다(DDA) 등 민감한 통상현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이해집단의 갈등과 대립이 최고조로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 '돈주고 산' 한ㆍ칠레 FTA


고건 국무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한ㆍ칠레 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앞두고 상호금융 이자의 3%포인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전해 주기로 하는 등 농민단체들의 요구사안들을 모두 들어줬다.


FTA 체결에 반대했던 농민들에게 정부가 사실상 '항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대가로 정부는 FTA 국회 비준을 챙겼으나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게 증폭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정부가 농민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반대급부를 제공한 것을 지켜본 노동계와 한계 기업들이 일부 제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한 한ㆍ일 FTA와 한ㆍ싱가포르 FTA 협상과정에서 제몫 챙기기를 위해 발목을 붙들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


특히 쌀시장 재개방 협상이나 WTO의 DDA협상은 한ㆍ칠레 FTA보다 농업에 미치는 타격이 훨씬 크고, 한ㆍ일 FTA와 한ㆍ싱가포르 FTA에는 노동자 단체들의 반대가 거셀 것으로 예상돼 통상강국으로서 한국의 입지는 크게 흔들릴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 국제신뢰 상실…향후 협상 차질 우려


정부는 올해 일본 싱가포르 아세안(ASEANㆍ동남아국가연합) 멕시코 등과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한ㆍ일 FTA는 2005년말, 한ㆍ싱가포르 FTA는 연내 협정 타결과 내년 상반기 발효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FTA를 추진하려는 한국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칠레 정부는 한국에 이미 크게 실망한 상태여서 이번 FTA 통과를 내심 반길지도 의문이고, 일본과 싱가포르 등도 한국 정부에 이해집단과의 사전 의견조율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한ㆍ일 FTA가 한국의 부품ㆍ소재 산업에 적지않은 피해를 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특히 자유무역국가인 싱가포르는 현재도 대부분 공산품에 수입관세를 물리지 않고 있어 FTA 체결로 인한 반사 이익은 거의 없는 반면 국내 수입시장 개방 충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여 국내 제조업계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가 과제라는 지적이다.



◆ 남미시장 진출엔 일단 '교두보'


한ㆍ칠레 FTA가 공식 발효되면 자동차 휴대전화 TV 등 칠레에 수출되는 2천4백50개 품목의 관세가 즉각 철폐된다.


또 협정 발효 후 10년이 지나면 한국 수출 품목의 96.5%가 관세를 물지 않게 돼 무역수지 개선이 기대된다.


현재 칠레는 수입 상품에 6%의 단일 관세를 물리고 있다.


한국은 작년 1∼11월까지 칠레와의 교역에서 4억9천만달러의 무역적자를 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양국간 FTA 체결로 한국 상품의 연간 대(對)칠레 수출이 6억6천만달러 늘어나며 수입이 2억6천만달러 증가, 무역수지가 4억달러가량 개선될 것으로 내다봤다.


농업분야에서도 당초 우려했던 것만큼 손실이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국내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사과 배 쌀 등 3개 품목은 시장개방 예외 품목으로 합의했으며 고추 마늘 양파 등 양념류와 일부 곡류는 DDA협상 후 관세 철폐 일정을 논의키로 했기 때문이다.



현승윤ㆍ이정호 기자 hyuns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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