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에서 혹한기에 자동차 성능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지역은 전 세계에 서너곳 정도다. 호수의 얼음 두께가 적어도 2m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스웨덴 아르헤폴로그 지역. 독일 보쉬,미국 델파이 등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자동차 부품회사뿐 아니라 BMW,다임러크라이슬러,포르셰,오펠,피아트 등 완성차업체들도 동계 주행시험장을 이곳에 두고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로 1시간반 북쪽으로 이동,시골 비행장인 아비추어에 도착하면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북극의 나라에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70km를 달려 마침내 동계 테스트장이 몰려 있는 아르헤폴로그에 도착했다. 기자가 찾은 테스트장은 독일 보쉬사가 운영하는 바이투덴. 11월부터 4월까지 4백여명의 보쉬 기술자들이 이 지역에서 숙식하며 세계적인 자동차메이커의 신차에 장착될 각종 부품 성능을 테스트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신차에 적용될 첨단 브레이크 시스템이 어떤 성능을 발휘하는 지 면밀히 체크하게 된다. 이같은 시험을 통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내야만 신차가 고객에 선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빙판길에서는 보쉬와 기술 제휴해 현대모비스가 생산할 최첨단 제동장치 "ESP"(차량자세제어장치.Electronic Stability Program)의 테스트가 한창이었다. 현대모비스 기술연구소에서 파견나온 강민구 선임연구원 등 4명이 영하 35도에서 제동장치의 성능을 매일같이 반복 체크하고 있다. 주행테스트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돌발 사고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기자는 자동차에 올랐다. ESP의 뛰어난 성능은 빙판길을 시속 70km로 달리다 급정거할 때 나타난다. 먼저 ESP가 없는 자동차를 타고 시속 70km로 달리다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자동차는 이내 중심을 잃고 두서너번 이상 회전한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운전자는 속수무책이다. 만약 테스트장이 아닌 실제 도로에서 이같은 상황이 빚어졌다면 인명 사고로 이어지는 대형사고가 일어났을 게 뻔하다. 이번에는 ESP를 장착한 차량으로 급 브레이크를 밟아봤다. 차량의 쏠림현상이 무언가에 의해 제어되는 느낌이 들면서 무사히 차가 멈춘다. 물론 아스팔트 길에서 처럼 완벽한 제동이 이뤄진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동차가 균형을 유지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또 ESP가 장착되지 않은 차량으로 고속 주행하다 급커브를 틀면 제 방향을 잃고 의도했던 방향에서 튀어나간다. 반면 ESP 장착 차량은 핸들을 급격히 돌려도 큰 무리없이 자동차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오르는데도 ESP는 확실한 성능을 발휘했다. 현대모비스 박상규 이사는 "ESP가 먼저 엔진의 출력을 감소시켜 자동차의 안전을 꾀한 뒤 네 바퀴에 각각 제동을 걸어 운전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쉬사에서 아시아지역 제동장치 마케팅을 담당하는 로버트 뫼닉 이사는 "다임러크라이슬러와 도요타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ESP를 장착하면 대형 교통사고를 50%까지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뛰어난 제동 성능을 발휘하는 ESP는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다. 현대 에쿠스와 기아 오피러스,쌍용 렉스턴 등 일부 고급 차종에만 장착됐다. 그러나 현대모비스가 보쉬와 기술 제휴를 통해 하반기부터 양산에 들어가면 국내 장착이 늘어날 전망이다. 현대모비스측은 올 하반기 출시될 현대 EF쏘나타 후속모델 NF(프로젝트명)부터 이 장치를 장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TG(그랜저의 후속모델),소형 SUV인 투싼,기아의 VQ(카니발 후속) 등에도 장착하게 된다. 현재 모비스의 충남 천안공장의 ESP 연산 능력은 1백만대 규모다. 물론 첨단 장치인 만큼 고객입장에서 차값이 1백만원 이상 오르는 부담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안전을 중시하는 경향에 비춰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게 자동차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ESP 장착률이 30%를 넘는다. 아르헤폴로그(스웨덴)=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