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카터의 이상주의..朴星來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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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더니 기어코 이라크 파병은 지난 13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제 국회의원 한 사람은 한 달 동안 사병 근무하러 이라크에 가게 됐고, 다른 국회의원 한 명은 약속대로 의원직을 사퇴하게 됐다.
이것 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아주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일은 파병 찬성 의원들의 낙선 운동을 벌이겠다는 일부 시민들의 다짐이다.
과연 파병에 찬성한 1백55명은 모두 낙선하고, 반대한 50명은 모두 다음 국회로 돌아올까?
우리의 이라크 파병 문제는 나에게 30년 전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한창일 때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는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약했다.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던 나는 동료 미국 학생에게 "카터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내가 보기에는 미국이 한국에 파병하고 있는 것은 미국인들의 국익을 위한 조치일 뿐이어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가 아무리 대통령이 된들 어찌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할 수 있을까보냐!"는 내 주장이었다.
그러나 카터 지지자였던 그 미국인 친구는 나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10여년을 끌며 미국을 망신시켰던 월남전쟁에서 그 전해(1975)에 막 물러난 미국인들에게 외국에 '쓸 데 없이' 미국 젊은이들을 주둔시키는 일이 비판의 대상이 돼 있었던 시절이었다.
내 눈에는 아무리 무지한 땅콩 농장 출신 정치가라도 이 뻔한 이치를 모를 까닭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미국이 한국에서 자진해 미군을 빼내가겠다면 그것은 그들의 국익에 손상을 입는 어리석은 짓이 될 뿐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지금의 한국처럼 반미 정서가 강하지도 않았다.
카터가 정말로 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것은 진정 자진해서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에도 심각한 손실이겠지만, 미국 역시 엄청난 손해가 분명해 보였다.
무지한 카터인들 설마 이런 간단한 이치를 모를 수 없건만 단지 대중의 표를 의식해 지킬 수 없는 공약을 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했고, 그래서 나는 그를 '사기꾼'이라 부른 것이다.
예상대로 1977년 52세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않았고, 미군은 지금도 이 땅에 있다.
물론 내가 그를 사기꾼이라고까지 부른 것은 그의 지나친 대중 영합(포퓰리즘)을 지적하는 뜻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재선에 실패한 다음 그는 세계를 돌며 좌충우돌식 외교 행각을 보였고, 그 가운데는 1994년 6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한반도 문제 해결에 진력했음은 다 알려진 일이다.
솔직히 나는 그의 이런 행동이 세계 평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재임 중인 1979년 11월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을 점거, 5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만든 사건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 특공대의 실패로 치명상을 입었다.
차라리 몇 년 전 우리나라에도 왔던 것처럼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 더 격에 맞는다고 나는 그를 평가한다.
아마 카터는 대단한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상이 정치를 좌우할 수는 없는 것을 어쩌랴! 근래 몇 년 동안 봇물처럼 터진 민주화의 물결 가운데 한국 젊은이들은 지나친 이상주의에 들떠있고, 그것이 걱정스런 요즈음이다.
최근 어느 글을 읽다 보니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이동전화 열 대 팔아 번 돈보다 이 땅에서 난 쌀과 고기, 채소가 잘 먹고 잘 사는데 더 소중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아마 FTA를 반대하자는 뜻인 듯하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무역 장벽이 무너져가는 것 역시 우리 한국인끼리 어쩔 수 없는 세계의 대세가 아닌가.
인간은 이상을 가지고 살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보다 지나치게 고매하다면 그것은 타락하기도 쉽고, 배반당하기도 쉽다.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라크 파병이 부디 보다 안전하게 마무리되기를 빌 따름이다.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