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체리부로를 죽였습니다. 조류독감 때문이 아니에요. 은행들은 저승사자나 다름없었어요. 조금만 참아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소용이 없더군요." 지난 9일 부도를 낸 국내 3위 닭고기 가공업체 체리부로의 김인식 회장은 "조류독감이 아니라 은행이 우리 회사를 죽였다"며 거래은행들을 원망했다. 수많은 닭과 병아리를 땅에 묻은 김 회장이지만 은행에 대한 원망은 아직 가슴에 묻지 못한 듯했다. 부도 후 사태 수습에 여념이 없는 그를 19일 충북 음성 양계장에서 만났다. 음성 양계장은 언제 조류독감 광풍이 불었느냐는 듯 평온했다. 며칠간 계속된 따뜻한 날씨로 온기마저 감돌았다. 이곳저곳을 안내하던 김 회장은 "병아리는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리고는 "마치 한여름 밤의 꿈만 같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연간 매출 1천2백억원의 체리부로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작년 12월17일. 충북 음성에서 첫 조류독감이 발생한지 이틀 뒤였다. 이날 체리부로는 조류독감 발생지역 3km 이내의 닭과 병아리를 모두 살처분하라는 정부 지시에 따라 닭 3만3천마리, 병아리 12만마리, 종란(부화용 알) 1백10만개를 죽이거나 묻어야 했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은행들의 자금 상환 독촉과 구매자금 지원 중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 저희부터 상환해주셔야죠." "조금만 참아주세요. 아직 초기잖아요. 제발 조금만 여유를 주세요." 김 회장과 자금담당 직원들은 눈물로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때만 해도 견딜 만했다. 나흘 뒤 천안 직산에서 2차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산업은행을 제외한 H,S,Y은행이 올해 대출금 37억원을 상환하라고 경쟁적으로 요구해 왔던 것이다. 조류독감이라는 뜻밖의 사태로 위기에 몰린 거래선을 돕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선 급한 대로 1억원, 2억원씩 상환했어요. 천안 양계장 부동산도 근저당 설정을 했죠. 은행 사정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자금담당자들을 도와줘야 했지요." 김 회장은 누굴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지만 신용상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은 이달 초부터 연체에 몰리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후 한 번도 없었던 연체였다. "열흘 연체하니까 은행전산망에 적색기업으로 뜨더군요." "직원들이랑 밤을 새며 자금을 조달하려 했지만 실패했어요. 결국 화의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고 처음으로 부도라는 걸 맞고 말았어요." 김 회장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김 회장은 "이런 얘길 신문에 쓰면 화의절차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며 "제발 은행 이름이라도 빼고 써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은행 사정도 이해해야죠"라는 김 회장의 말에서 영원히 '을(乙)'일 수밖에 없는 한 기업인의 애환이 묻어나왔다. 고기완ㆍ강은구 기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