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관리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지 지금처럼 "비 올 때 우산 빼앗아 가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거래기업의 경영지표가 안좋아졌다면 그 것이 구조적 문제인지,아니면 일시적인 문제인지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은행들은 어느 한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했다는 소문만 나면 앞뒤 안가리고 너도나도 회수에 들어가곤 한다" 국책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체리부로의 부도사례를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이런 행태를 바꾸려면 은행들의 리스크관리 시스템 선진화도 필요하지만 부실여신에 대한 금융감독 방식의 개선도 따라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묻지마'식 여신회수 사례 중소 수출업체인 A기업은 최근 몇 개월 사이 모든 거래은행으로부터 1백억원 이상을 회수당해 자금난을 겪고 있다. 대규모 시설투자를 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동률이 낮았던 반면 회계처리상 감가상각비는 커 적자가 발생하자 은행들이 너나없이 대출 회수에 나선 것.결국 이 회사는 수출 방식을 외상거래에서 현금거래 방식으로 바꾸는 비상전략을 펴고 있다. 국책은행의 한 임원은 최근 대전에 있는 중소기업 B사로부터 대출 요청을 받았다. 회사 내용이 괜찮다고 판단한 대출담당 임원은 부하직원을 불러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심사보고서는 '대출거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은행들이 B사 대출금을 회수하고 있다. 우리가 지원해주면 C은행이 그 돈을 그대로 빼내갈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 작년엔 수협 등 일부 은행들이 수재민들을 '두 번 울려' 사회문제화된 적도 있다. 태풍 매미로 가두리 양식업자들이 큰 피해를 보자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은행들이 대출금을 갚으라고 벌떼처럼 몰려든 것.은행들은 "양식장을 담보로 대출해줬는데 담보물이 유실됐으니 회수가 불가피했다"고 해명했지만 양식업자들이 회생할 기회를 박탈해 자신들의 손실도 커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금융계의 이런 풍토에는 은행과 기업,감독당국 등 이해관계자 모두 책임이 있다는 분석이다. 우선 은행들의 여신심사 능력이 아직도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대부분 시중은행들은 올해 경영 전략으로 '위험관리 강화'를 내걸고 있지만 정작 위험관리를 전담하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사람이 모자르니 현장심사는 불가능하다. 실증적 분석이 뒷받침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작은 소문만 돌아도 은행들은 여신 회수에 돌입한다. 정보가 없어도 다른 은행이 회수에 들어가면 '우리가 모르는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부화뇌동하게 된다. 기업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평상시 채권자들에게 회사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신뢰를 높이는 작업에 소홀했던 결과다. 주식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기업설명회(IR)에는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채권자를 상대로 CR(Creditor Relationship)를 하는 기업은 한 군데도 없다. 감독당국과 은행들의 직원 평가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 특정 기업이 부도가 나면 해당 여신을 취급한 직원들은 감사를 받고 책임을 지게 돼 있다. 이에 대해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사장은 "수십개 기업에 대출해 1백억원을 벌고 1억원을 손해본 직원이 있으면 칭찬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러나 실상은 그 1억원 때문에 문책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