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전자서명제도] (상) 유명무실한 전자서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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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서명제도는 정부가 전자상거래를 활성화시키고 전자정부를 조기에 구현하기 위해 국책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그런만큼 전자서명법 등 관련법과 제도는 엄격하게 갖춰졌다.
그러나 정작 관련법을 어겨도 규제는 솜방망이다.
공인인증서 시장에 경쟁원리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인증서의 상호연동서비스가 필수적이나 일부 금융회사는 연동을 꺼리고 있다.
이같이 연동의무를 위반한 사례에 대한 정부의 제재는 기껏해야 시정을 권고하는 수준이다.
게다가 공인인증서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도 척박하기만 하다.
가장 시급한 문제인 유료화마저 업계의 이해관계가 얽혀 당초 계획보다 1년가량 늦춰지고 있다.
◆전자서명법은 종이호랑이=1999년 공포된 전자서명법은 전자상거래를 도입한 금융회사나 기업이 특정기관의 공인인증서만 요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엄격한 처벌규정을 두고 있다.
그동안 은행과 카드사 등 상당수 금융기관이 이를 어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통부의 제재는 규칙을 준수할 것을 권고하는 선에 그쳤다.
더구나 삼성생명을 비롯한 대형 생보사들은 아직도 "타인의 신분증으로 인증서를 발급받은 뒤 대출해가는 사고가 터지고 있다"며 상호연동을 꺼리고 있다.
생보사 관계자들은 "금융결제원의 인증서만 사용해도 사고가 일어나는데 상호연동까지 되면 사고 위험이 더욱 높아진다"며 "연동시스템 가동 여부를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삼성생명측은 연동시스템을 작년 말 갖췄으나 보안사고 위험이 높아 별도의 보완작업을 거친 뒤 4월께 연동하는 문제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통부는 "처벌할 명분이 부족하다"며 뒷짐만 지고 있다.
정통부 관계자는 "설령 위반사실을 고발하더라도 아예 공인인증시스템 자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뺌하면 법적 구속력이 없어지게 된다"며 관련법의 한계를 지적했다.
◆가격 논쟁이 발목잡아=공인인증기관들 사이에 인증서 발급 수수료를 어느선에서 책정할 것이냐를 놓고 벌어진 힘겨루기도 전자서명제를 조기 정착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인증기관 가운데 은행권의 지원을 받고 있어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금융결제원은 인증서 가격을 2천원선에서 결정할 것을 주장해왔다.
반면 전문 인증기관은 최소한 5천원은 돼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인증서의 유료화 시기가 계속 늦춰지고 있다.
6개 공인인증기관 가운데 금융결제원과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전산원 증권전산원 한국무역정보통신처럼 수익원이 다양한 경우는 비교적 여유가 있다.
그러나 한국전자인증 한국정보인증 등 전문 인증기관은 사정이 달라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정통부는 최근 진통 끝에 오는 5월부터 유료화를 실시키로 하고 인증서 발급수수료를 연간 4천∼5천원선(신규 발급시)에서 결정하기로 합의를 도출해냈다.
하지만 5월까지 유료화 문제가 완전 타결된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 논란의 불씨도 여전히 남아 있다.
1년 간의 유효기간이 지난 뒤 발생하는 재발급 수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또 한차례 가격 논쟁이 불거질 수 있다.
또 일부 업무용으로 제한하는 용도제한용 공인인증서의 가격이나 사용범위에 관한 정책이 없어 새로운 분쟁의 불씨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도산 위기 맞은 전문 인증기관=인증서 유료화가 지연됨에 따라 대부분의 인증기관들이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인증사업만 하는 한국전자인증은 파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01년 말에 공인인증기관으로 승인받은 이후 2년간 1백억원 규모의 적자를 내 사실상 자본잠식 상태다.
한국정보인증의 경우엔 별도의 인증 솔루션사업으로 다소 손실을 만회하긴 했지만 여전히 적자(30억원)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증권전산과 한국무역정보통신도 인증사업 분야에서 각각 2백억원과 80억원의 손실을 냈다.
고성연 기자 amaz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