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한국경제교육학회장과 한국경제학회장, 금융산업발전심의회 위원장 등을 지내며 37년간 국내 경제학계의 '거목'으로 활동해온 김병주 서강대 교수(65)가 지난 2월 정년퇴임했다. 서강대 명예교수 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자리를 옮겨 후학양성을 계속하는 김 교수는 중국의 장자(莊子)가 인간세편(人間世篇)에서 말한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며 대담의 말문을 열었다. "쓸만한 나무는 일찍 베어가 버리고 쓸모없어 보인 나는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키게 됐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로 정ㆍ관계 진출의 온갖 유혹을 떨치고 묵묵히 학문 일선을 지켜온 소회를 털어놓은 것. 김 교수를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 -1967년 한양대에서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번의 외도없이 한국 경제학계를 지켜 오셨습니다. 정년퇴임하는 소회는 어떠신지요. "제가 서강대에 왔던 1970년에는 남덕우 교수(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 역임)는 이미 학교를 떠났고 이승윤ㆍ김만제 교수(둘 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재무부 장관 역임)가 학교에 남아있던 무렵이었습니다. 거목들은 중간에 다 잘려나가 고대광실에 쓰이고, 시원치 않은 나무가 더 오래가고 커서 늙은 나무가 됐습니다. 쓸모가 없는 무용(無用)이라서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강대 경제학 교수들은 '서강학파'라 불리며 경제개발 시대를 주도한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강대를 정년때까지 지킨 교수로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서강학파를 출세지향적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교수만 하면 되지 밖에 나가서 관변학자가 되고 감투까지 쓰느냐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서강학파라는 것이 헛이름은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다른 대학에는 '경제발전을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시장은 실패한다,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서강대는 미국식 교육을 해서 그런지 '시장이 실패할 수도 있지만 시장 메커니즘을 살려서 하는 것이 경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서강학파와 다른 학교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수진에도 다른 학교와 차이가 있었습니까. "당시 서강대 교수가 받는 월급은 다른 대학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서울대에 있다가 서강대로 옮긴 이승윤 교수에게 '왜 서강대로 왔느냐'고 여쭤봤더니 '봉급을 세배 주는데 왜 안오느냐'고 말했습니다. 당시 서강대는 학생수가 8백명남짓 밖에 안되는 조그만 학교였으나 교수진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고 우수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부나 정치권에서 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무용(無用)한 인간으로 교수를 하는 것만도 과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끝을 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경제신문을 포함한 많은 신문에 칼럼을 쓰시며 필명도 쌓으셨지요. "나는 사람들의 머리 속 생각을 좌우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쪽으로 직장을 정했습니다. 오피니언 메이킹이라고 할까요. 물론 목사나 신문기자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것이 교육자가 아닌가 생각해 교수가 됐습니다. 그러나 18세부터 22세의 젊은 대학생들만 상대하기에는 그 효과가 너무 완곡하고 간접적이어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싶었습니다. 내 생각을 말하고 싶고, 여론에 영향을 주고 싶어 칼럼을 썼습니다. 한국경제신문에는 죽마고우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고맙게 대해줘 한국경제신문에 많이 쓰게됐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에도 많은 조언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금융개편 작업에도 참여해 봤고 금융시장개방 블루프린트를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1986년부터 4년8개월동안 금융통화위원으로 일했습니다. 1997년에는 금융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시 내놓았던 아이디어는 외환위기 전에 통과못했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조개편안에 대부분 반영됐습니다. 당시 금융개혁위원으로 이헌재 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있었는데 그때는 낭인 시절이었습니다. 그 분도 금융개혁에는 반대했습니다. 당시 재경부 전직관료들이 위원회에 몇명 있었는데 '모피아(재경부 관료들을 마피아 조직에 빗대 표현한 말)' 출신이니까 반대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당시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을 포함한 재경부 사람들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고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헌재 부총리는 당시 금융회사 퇴출에 대해 많이 공부했는데 그게 인연이 돼 금감위원장을 잘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김대중 정부 때에는 은행의 제2차 구조조정을 맡은 은행경영평가 위원장을 역임했는데 김대환 노동부장관도 위원으로 같이 활동했지요." -지난 20여년간 신문에 칼럼을 게재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요.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을 때에는 첫 민간정부라서 애착이 많았고 아는 사람도 많이 있어 애정이 있었습니다. 경복고 후배들도 많았지요. 그러나 취임사 이후 하는 것을 보니까 '아, 이것 잘못하면 큰일나겠구나'라고 생각해 몇차례 비판하는 칼럼을 냈더니 반(反)YS로 보고 나를 견제하더군요. 정부는 당시 모 공기업의 이사장으로 발령을 내기까지 했는데 끝까지 안가겠다고 하니까 찍혔습니다. 몇몇 신문사에서는 갑자기 '얘기 끝났다'는 식으로 글 쓰는 것을 봉쇄하더군요. 그 바람에 한동안 글을 못썼습니다." -어떤 내용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는지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국민 인기도는 80∼90%였는데 국민의 인기만 좇는 것 같아 걱정이 됐습니다. 김 대통령이 잘못하면 국민은 옛날 군사정권 시대를 더 선호하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었지요. 지금이 그렇지 않습니까. 박정희 시대가 좋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돈을 많이 먹었지만 경제는 잘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노무현 정부가 잘하는 일과 잘못하는 일은 무엇인지요. "정부가 반기업 정서를 너무 이용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처럼 정면대결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추파를 던지고….어떤 때에는 친기업적인 말을 하고 어떤 때에는 반기업적인 말을 해서는 설비투자나 연구개발이 제대로 안되고 고용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한ㆍ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은 중국 일본 러시아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멀리있는 미국을 끌어들여 이이제이(以夷制夷)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미국 좋아하네. 우리도 미국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렇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도 불안을 초래하는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 대담 = 현승윤 경제부 기자 hyunsy@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