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톱스타와 평범한 서점주인의 사랑을 그린 영화 '노팅힐'(1999년)에서 주인공인 여배우는 편당 출연료로 얼마나 받느냐는 물음에 "1천5백만달러"라고 답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규모를 말해주는 액수다. '쥬라기공원'(93년)때 6천3백만달러이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제작비는 97년 '타이타닉'(2억달러)을 계기로 1억달러를 넘어선 뒤 '터미네이터 3'(2003)에 오면 1억7천만달러에 이른다. 할리우드에 비하면 어림없지만 국내 제작비도 급증하면서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가 열릴 지도 모른다는 소식이다. 1백20억원이 투입된 '실미도'가 관객 1천만명을 동원한데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이 기록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되면서 한국영화 평균제작비(35억원)의 2배가 넘는 70억원 이상짜리 대작이 잇따라 기획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이 점쳐진 건 99년 '쉬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27억원을 들인 '쉬리'에 이어 2000년의 '공동경비구역 JSA'와 2001년 '친구'가 잇따라 대박을 터뜨리면서 제작비 50억원 이상의 대작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무사' '화산고' '2002 로스트 메모리즈'가 손익분기점을 겨우 맞추거나 그렇지 못한데 이어 1백10억원이나 들여 만든 '성냥팔이소녀의 재림'까지 흥행에 완전 참패하자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끝났다는 얘기마저 나왔다. 이런 가운데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 1천만명 시대를 열면서 블록버스터 붐이 다시 일 조짐이라는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들면 언젠가 할리우드와 승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쉬리' 이후 일었던 대작붐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데서 보듯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기력 없이 마케팅에만 의존해선 세계 시장은 물론 국내 관객에게까지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지난해 한국영화가 사상 유례없는 높은 점유율을 기록한 것은 다양한 장르와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잘 만든 영화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규모와 특수효과보다 영화의 완성도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작은 독립영화의 활성화에 보다 힘을 기울일 때 한국영화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가능할 것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