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 중반 국내 냉장고 시장은 삼성, LG, 대우 등 가전3사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1조원대의 시장을 놓고 이들 3개사는 피 튀기는 시장점유율 경쟁을 벌였다.


LG가 위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샤워냉각방식으로 포문을 열자 삼성은 냉동실과 냉장실을 완전 분리한 독립냉각방식으로 맞대응했다.


대우도 냉기를 5분간격으로 짧고 강하게 뿜는 터보냉각방식으로 응수했다.


경쟁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95년 냉장고 시장에 뛰어든 위니아만도(옛 만도기계)는 이들 업체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기능 경쟁에 가세하지 않고 김치 냉장고라는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냈다.


신시장을 개척한 위니아만도는 가전3사와의 경쟁을 피하면서 고속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김치냉장고 '딤채'는 출시 첫해에 4천대가 판매된데 이어 이듬해 2만대, 그 다음해 8만대가 팔리는 등 매년 2백% 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딤채가 개척한 김치냉장고 시장도 고속성장을 거듭하며 지난 2001년에는 1조원대(1백20만대)를 넘어섰다.



딤채의 성공요인은 경쟁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버린데 있다.


가전3사가 냉장고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위니아만도는 기존의 냉장고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대안(alternative)을 찾는 비(非)고객에 주목했다.


특히 냉장고 대신 여전히 김장독을 사용해 김치를 보관하거나 아예 조금씩 사다먹는 소비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김치는 전통적으로 가을, 초겨울에 담가 김장독에 보관한 뒤 봄까지 먹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아파트가 널리 보급되면서 김장독을 땅속에 묻는게 어려워졌다.


곧 이를 대체할 다양한 방법들이 선보였다.


김치를 플라스틱통이나 비닐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담그지 않고 사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냉장고에 김치를 보관하면 문을 여닫는 과정에서 쉽게 익어버려 찌개거리로 밖에 쓸 수 없었다.


사먹는 김치도 유통과정에서 익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위니아만도는 김치를 싱싱하게 보관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를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김치보관기능을 추가한 냉장고를 출시해 경쟁자들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김장독'처럼 김치를 싱싱하게 유지해 주는 김치 전용 냉장고를 출시해 새시장을 창출할 것인가.


위니아만도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땅속 김장독의 김치 맛을 그대로 재현해 주는 전용 냉장고 개발에 나섰다.


1992년의 일이다.


김치냉장고 개발 프로젝트팀은 김장독의 원리를 철저히 분석, 장점만을 흡수했다.


우선 냉기 유출을 막기 위해 김장독처럼 뚜껑을 위로 여는 상부개폐 방식을 채택했다.


이음새가 없는 일체형 저장고 방식도 사용했다.


또 김장독처럼 외벽부터 서서히 냉각시키는 직접 냉각방식을 적용했다.


물기있는 음식보관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플라스틱 보관용기에도 김장독에 사용되는 천연황토를 섞었다.


최상의 김치맛을 내기 위한 각종 환경조건들을 프로그램화시킨 김치숙성 알고리즘도 채택했다.


기능상의 중점을 일반 냉장고와 비교한 전략캔버스를 보면 딤채가 기존 냉장고에 비해 새롭게 찾아낸 가치들을 쉽게 알 수 있다.


딤채는 일반 냉장고가 갖고 있던 일부 장점 가운데 김치 보관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들에게 별 가치가 없는 기능은 포기했다.


우선 냉동기능을 제거했다.


뚜껑을 위로 열면서 생기는 사용상의 불편함, 공간활용의 불리함도 감수해야 했다.


딤채는 대신 김장독과 같은 장점을 대폭 강화했다.


김치 보관기간을 크게 늘렸다.


김치맛은 김장독 김치 수준으로 높였다.


집안에 둘 수 있는 김장독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가치혁신(Value Innovation)론에 따르면 새로운 가치를 갖는 신제품을 개발했을 때 다른 회사들이 모방하거나 추격할 수 없도록 전략적으로 낮는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딤채는 일반 냉장고에 비해 전혀 싸지 않은 가격(출시 당시 50만원대)대로 책정했다.


핵심기능에 대한 특허 4백60건을 보유해 다른 기업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딤채는 이후 가열된 국내 유수 가전회사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5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딤채의 성공 비결을 구전(口傳)마케팅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위니아만도는 첫 제품이 나왔을 때 서울 강남지역 중산층 주부들에게 딤채 5천대를 나눠준 뒤 3개월 동안 직접 사용 후 구매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해당 주부 80% 이상이 김치냉장고를 샀다.


그 후 출시된 딤채가 두달만에 매진됐다.


주부들 '입'을 통해 소문이 급속히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전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만 보기엔 딤채는 너무 '가치혁신적'이다.


구전마케팅만으론 이전에는 전혀 없던 상품을 만들어 10년이 채 못되는 기간 동안 연 1조4천억원 규모의 시장을 만들어낸 '비약'을 설명할 수 없어서다.



송대섭 기자 dss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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