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김종창 전 기업은행장이 금융통화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 데스크에 익명의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후임 기업은행장 물망에 오른 모 인사를 비방하는 투서(投書)였다. 나중에 보니 투서가 물고 늘어졌던 문제의 인물은 행장에 응모하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투서의 '무차별성'에 뒷맛이 씁쓸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권에는 지각변동이라 할 만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풍토병'들,예를 들어 인사철마다 살아나는 관치 시비,정치권 압력,투서 등의 잡음은 살아남았다. 17 대 1,15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던 기업은행장과 우리금융 회장 인선에서도 이 고질병은 여지없이 재발했다. 기업은행장 자리는 전임 행장이 자리를 옮기자마자 투서가 돌고 '낙하산' 시비가 일었다. 우리금융 회장 인선을 두고는 '청와대의 386세력이 특정 지역 출신을 밀고 있다' '이헌재 부총리가 특정 후보를 미리 낙점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폐해가 일과성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공모를 거쳐 낙점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직 내에서 최고경영자(CEO)로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능력보다도 이런 저런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비칠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풍토병'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그 답은 현재의 인선 방식,즉 행장후보추천위원회나 회장후보추천위원회 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서 찾는 게 지름길이다. 사실 행추위 제도도 '외부 청탁과 압력을 배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하지만 제도 운영상의 결함으로 그 효과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결함은 CEO감을 너무 단기간에 물색한다는 점이다. 우리금융이나 기업은행의 경우도 서류전형과 간단한 면접을 거쳐 사람을 걸러냈다. 이번 기업은행장 공모에 응했던 모 금융인은 "한 시간도 안되는 면담에서 사람을 얼마나 평가할 수 있겠냐"며 자신이 응모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헌재 부총리가 지난 4일 "행장 선임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부총리는 "한 달 전에 추천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검증하고 능력 보고 하면서 자꾸 줄여가는,그래서 막판에 2∼3명 가지고 고민을 하는 쪽으로 돼야 한다"며 꽤 구체적인 구상도 밝혔다. 이와 관련,김정태 국민은행장의 지난 2일 발언도 관심을 끈다. 김 행장은 이날 "선진국에서는 후임 CEO를 키우는 게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며 "유능한 후임자를 선임하기 위해 행추위를 만들고 이를 '상설기구화'하겠다"고 말했다. 또 "행추위를 통해 후계자를 선임하는 데에는 1∼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밝혔다. 언뜻 봐도 두 사람의 발언은 거의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더 주목되는 것은 김 행장이 문제의 발언을 하기 전인 지난달 23일 이헌재 부총리를 면담했다는 점이다. '이 부총리와 김 행장의 교감'을 추측해 볼 만한 정황증거다. 이 부총리는 자신의 의중을 제3자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조만간 은행권에 '행추위 상설기구화'가 추진될 것이라는 게 데스크의 감이다. 물론 그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후보군(群)이 협소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인물이 선임될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한국 금융가의 풍토병을 치유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기대해 볼 만한 것 같다. limhyu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