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배스] 2천년 생생한 역사…英國속 '작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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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아침 뉴스쇼 기상캐스터가 털모자에 장갑까지 끼고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며 호들갑이다.
런던엔 때마침 쌀쌀한 바람이 불고, 추적추적 비까지 내린다.
험상궂은 날씨를 좋아할 여행객이 어디 있겠는가.
배스에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기차에 오른다.
런던 패딩턴역을 출발해 서쪽으로 1시간30분.
도시 세 곳을 지나니 배스 스파역이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대리석 집들이 몰려 있다.
겨울바람이 아직 남아 있는데 잔디는 푸르다.
꽃도 여기저기 피어 있다.
마중 나온 가이드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곳이 배스라고 귀띔한다.
멘딥 언덕이 주위를 감싸고, 에이번 강이 가로지르는 인구 8만여 명의 소도시.
한적한 시골 마을에 온 것 같다.
그러나 첫 인상에 속으면 안된다.
배스는 영국에서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
2천년의 역사가 숨쉬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4천5백여개의 건물이 문화재급이고 1988년 유네스코에 의해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기 43년 로마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케사르의 후예들은 이곳 온천에 주목했다.
그들은 온천 주위에 목욕탕과 신전이 어우러진 휴양지를 건설했다.
410년 로마인들이 떠난 뒤 도시는 버려졌지만 온천 목욕탕이 있던 이곳은 '배스(Bath)'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됐다.
배스는 18세기 조지왕조 때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여왕 등 귀족이 휴양 삼아 자주 찾은 게 계기였다.
로마풍의 팔라디오 양식으로 지어진 대리석 건물들이 대로를 따라 줄지어 들어섰다.
보통 3∼4층에 세모꼴 지붕, 삐죽삐죽 솟은 굴뚝, 격자형의 기다란 창문이 특징이다.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이곳을 배경으로 '노생거 수도원' '설득' 등 두 편의 소설을 써 문화적 향기를 더했다.
중심지인 교회광장엔 1세기의 유적인 로마 온천탕, 15세기에 지어진 배스 교회, 18세기 상류사회 인사들이 모여 온천수를 마시던 펌프룸 등이 있다.
배스의 하이라이트 세 곳이 모여 있으니 관광객이 늘 북적댄다.
잉글랜드를 최초로 통일한 애드거가 973년 대관식을 거행했던 배스 교회는 천장 높이 23m의 당당한 고딕 양식 건물이다.
교회 오른쪽엔 로마 온천탕 유적이 있다.
영국인들이 배스하면 맨 먼저 떠올리는 곳이다.
2층으로 올라가 그레이트 배스를 내려다 본다.
조류(藻類)가 많아서인지 물은 초록색이다.
이곳에선 평균 46도의 온천수가 하루 1백20만ℓ씩 용출한다.
여러 차례의 조사에도 수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하엔 사우나를 위한 온돌장치, 냉탕, 배수시설 등이 있다.
신전 유적도 있다.
로마인들은 켈트족의 여신 설리스와 자신들의 신 미네르바를 동일시해 '미네르바 설리스' 신전을 세웠다.
동전 등 봉헌물들은 온천에 던져졌다.
도망간 아내, 변심한 애인을 저주하는 글을 써놓은 납판이 눈길을 끈다.
로마신전 유적 위는 펌프룸이다.
18세기엔 귀족들이 아침마다 이곳에 모였다.
그들은 간밤의 주독을 씻는다며 세 잔의 온천수를 들이켰다고 한다.
펌프룸은 현재 차를 마시거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42가지 광물질이 들어 있다는 온천수를 시음할 수 있다.
북쪽으로 10분쯤 걸어 게이 스트리트 끝에 이르면 원형광장을 만난다.
초생달 모양의 주택인 '크레슨트' 3채가 모여 완벽한 원을 이루고, 중앙에서 세 갈래 길이 방사상으로 뻗어 나간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삼등분한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10m도 넘어 보이는 다섯 그루의 거목이 광장 중앙에 우뚝하다.
18세기엔 그곳에 우물이 있었지만 하녀들이 모여 주인 험담을 자주 하기에 폐쇄했다고.
원형광장에서 브록 스트리트를 따라 비탈길을 올라가면 로열 크레슨트가 나온다.
로마 온천탕 다음으로 유명한 곳이다.
30채의 주택이 나란히 붙어 초생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다.
높이 15m, 길이 1백60m로 1백14개의 기둥이 우람하다.
건물 앞에 서면 녹색 잔디밭이 시원히 펼쳐져 가슴이 탁 트인다.
건물 한 채가 최근 8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온천 유적으로 유명한 배스지만 여행객의 피로를 풀 온천욕장은 없다.
19세기부터 해수욕장이 인기를 끌면서 온천이 쇠퇴한 탓이다.
1978년 마지막 온천탕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배스에 와도 호텔에서 샤워하는게 고작이다.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연내에 '뉴 로열 배스'라는 온천욕장이 문을 열 계획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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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수첩 >
런던에서 배스까지 기찻길이 나 있다.
1시간30분정도 걸린다.
영국 ACP마케팅에서 영국 철도 패스를 판매하는데 국내 여행사에서 미리 구입해야 한다.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버스를 타면 배스까지 3시간40분 걸린다.
배스의 교회광장 옆 샐리 런즈가 제일 유명한 식당이다.
배스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기도 하다.
1680년 샐리 런이 만들기 시작한 둥근 빵이 특색있다.
빵 위에 버섯, 쇠고기, 연어 등을 얹어주는 트렌처가 추천 요리.
배스에선 눈을 돌리면 모두 문화재다.
여행 전에 서양 건축사, 온천 문화사에 대한 책을 읽어두면 좋다.
배스 홈페이지(www.visitbath.co.uk)는 훌륭한 안내자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거나 국내에도 개봉된 '센스 앤 센서빌러티'와 '엠마' 비디오를 보면 배스를 미리 느낄 수 있을 듯.
영국관광청 www.visitbritain.com
배스(영국)=고호진 기자 vince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