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벌써 여든다섯이었다. '론-야스(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의 태평양 보수 동맹을 만들어 냈던 것이 지난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니 자연인으로서는 늙었다는 말을 들어도 섭섭해할 수 없는 나이다. 작년에는 젊은 의원들의 공격을 받아 결국 집권 자유민주당 중의원 종신직을 포기했다. 늙으면 섭섭한 것이 더욱 많아 진다고 했는데 그도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탄핵정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나카소네 전 총리를 면담할 기회가 있었다. 의례적으로 건강을 묻는 인사를 건넸는데 돌아온 답이 뜻밖이다. "이미 나이가 많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의 슬픔과 기쁨까지 모두 잊으려고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예민한 감수성이 느껴졌다. 정치가도 경지에 오르면 시인이 되는 것인지…. 노(老)보수정객에게 한국과 일본의 정치를 묻는 것은 서로에게 그다지 마음 편치 않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기성질서가 무너지면서 국민 전체가 점토에서 모래로 바스라지고 있는 전환기라고 봅니다." "이 혼란은 얼마나 지속되겠습니까." "글쎄. 10년 정도는 간다고 봐야겠지요."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목소리는 훨씬 낮아져 있었다. 그러나 맙소사…10년이라니! "혼란이 끝난 다음에는 전혀 새로운 권력집단이 들어서지 않을런지…." 그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았다. 이미 의원직은 내놓았지만 그는 정치의 장에서 은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자민당 의원의 평균연령이 50대요,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민주당이 40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흘러간 가락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한때 태평양과 아시아를 경영했고 지금까지도 일본 보수정파를 지도하고 있는 그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적지는 않다. 내친 김에 중국의 전도(前途)를 물었다. "오는 2020년까지 GDP(국내총생산)에서 일본을 따라잡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두고 봐야지요." 그는 중국이 당분간은 대단한 성장세를 보이겠지만 2008년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박람회 이후에는 여러가지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2010년과 2020년 사이에 중국도 큰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주제 탓일 테다. 모두가 숨죽이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전환적 순간이 아시아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한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 각국의 정치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물살 빠른 여울목에 떠밀려 들어서있다. 국민들은 대혼돈에 직면해 흥분하고, 격정에 휩싸이며, 과민 반응하고, 서로가 공격의 칼날을 들이대는 그런 시대로 2004년의 봄날이 진행되는 와중이다. 그것은 거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무의식적인 반응일지도 모를 일이다. 기자가 작년에 도쿄를 방문했을 때 나카소네는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비슷한 분위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자는 아쉽게도 그 생각이 지금도 변함이 없는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이번 일본 취재 중에 만난 아베 자민당 간사장은 기자에게 고이즈미 총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신을 소수파(약자)처럼 보이게 하는 장점이 있다"고…. 그 점에 있어서는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가 별차이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이념적 백그라운드를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 질지도 모르겠다. 나카소네의 사무실 벽에는 그가 즐겨 그리는 부엉이 한마리가 눈을 빤히 뜬 채 무표정하게 건너다보고 있다. 그 그림에는 지기(知己)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지만 한국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금은 어디를 직시하고 있는지…. 정규재 < 부국장 jkj@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