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결정의 순간이 왔다. 이제 늦은 저녁이면 정국의 향방을 좌우할 17대 총선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던 후보들이 당락의 희비로 갈라 설 것이고, 훨씬 더 많은 이들이 다시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의 행려로 되돌아 갈 것이다. 이번 선거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악과 분노, 오욕을 겪어야 했던가. 하루가 멀다하고 드러나는 정치와 정치인들의 비리, 부정을 보며 우리는 환멸을 느꼈다. 낙심천만, 희망의 소식은커녕 차떼기다 측근비리다 연일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탄핵소추까지, 그리고 노인폄훼 망언과 이를 틈탄 세대갈등의 데마고그(선동정치가)에 이르기까지 그 얼마나 황망하고 수치스런 정치 썩은 냄새가 한반도 그리 넓지도 않은 천지를 진동했던가. 환멸의 정치, 정녕 연을 끊고 내팽개쳐 버리고 싶었던 우리 정치, 정치인들이 사회전체를 타락의 구덩이로 마구 몰아넣었던 지난 몇 달, 아프지 않아도 고통을 느끼고 진정하려 해도 가슴 울렁임을 막을수 없었던 혼돈의 계절이었다. 너무도 고단한 여정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정녕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되물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상처 입은 대중의 마음을 헤아린다며 정치인들이 택한 길은 감성과 이미지를 버무린 멀티미디어 신파형 이벤트정치였다. 눈물과 읍소, 삭발과 단식, 3보1배, 결정적 순간마다 지역주의에 몸을 의탁해 자학과 고행의 이벤트가 이어졌다. 대중의 마음 약한 부위를 파고드는 정치인들의 이 기막힌 본능, 괴상한 습성에, 그 부끄러움도 모르는 열정에 우리는 다시 한번 식상했다. 두렵고 불안한 대중의 마음을 볼모로 한 축축하고 처연한 멜로드라마가 전파를 타고 퍼질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속고 있는 스스로를 깨닫고 우린 다시 한번 전율했다.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뻔히 속을 줄 알면서 다시 또 누구에게 나라 일을 맡겨야 하는가. 그러나 절망과 개탄의 한숨 끊이지 않아도 이제 또 다시 결정의 순간이다. 이번 선거로 국민이 다시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지 판가름난다. 그 동안 대표로 뽑힌 자들이 뽑아준 사람들의 뜻을 거슬러 사리사복과 당파적 이익만을 챙기더라도 막을 길이 없었다. 국민은 하릴 없이 그저 4년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얼굴을 바꾼 후보들의 읍소에 홀려 뻔히 알면서도 귀중한 한 표를 허비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치명적 맹점이 드러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과 지난 대선, 가깝게는 이번 탄핵정국에서의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말 없던 다수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게 아닌가. 그러니 뻔히 알면서도 속았던 우둔의 과거, 고단한 현재를 툴툴 털고 일어나 이제 투표소로 가자. 그래도 누구에게 우리 모두의 일을 맡길 것인지, 우리가 결정하는 일이 돼야지, 또 다시 원치도 않는 인물들이 대표입네 분탕질을 치게끔 내버려 둬서는 안될 일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1인2투표제여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대단히 중요하다. 두번째 녹색 투표용지로 정당을 선택한다. 한 표는 지역구 후보에게 주었으니 다른 한 표는 인심이나 쓰자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느 한 표도 결코 헐하지 않다. 전체 의석 2백99석중 56석이 비례대표니 5.3석당 1석이 정당 득표로 선출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당투표는 정당의 정치를 객관적으로 심판하고 향후 어떤 정치를 원하는지를 선택하는 의미가 있다. 지역구 후보 선택 못지않게 정당 선택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제 정치의 계절이 끝나간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눈물도 우격다짐도, 석고대죄나 3보1배도 이젠 그만, 모두 그만이다. 주권을 회복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정치는 바로 유권자들이 만드는 것 이상이 될수 없다. 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역정서나 세대갈등, 학연이나 지연, 정실 등 주권회복을 위해 버려야할 나쁜 버릇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은가. 1백년 후 누가 보더라도, 자식들에게 떳떳하고 스스로에게 명예롭게, 정정당당 준엄한 심판의 표를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투표를 하자! <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