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죽기살기였다. 대통령이 '재신임'문제로 배수진을 치고 나오면서 막이 올랐고 대선자금 수사를 거쳐 탄핵으로까지 미친 듯이 떠밀려갔던 수개월의 폭풍이 비로소 잦아들었다. 부동(不動)의 30%대 30%가 맞서고 부동(浮動)하는 40%가 감성과 이미지,분위기에 휩쓸린 것이 이번 선거의 경과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전략은 노선과 이념은 뒤로,대선자금과 부정부패 문제는 전면으로 부각시킨 다음 전국을 몇개 권역으로 나누고 각개격파하자는 것으로 보였었다. 대통령의 고향인 부산 경남을 밑천으로 하고 행정수도로 충청권을 묶어 놓은 다음 정동영 의장을 내세워 호남표를 모은다는. 이념과 노선은 숨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직은 전면에 내세울 만큼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헌재 등 보수파 장관을 기용하고 후보 공천에서도 적지 않은 우파인사를 기용한 것으로 위장전술을 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어떻든 방송이 가세하고 시민단체들까지 대거 뛰어들어 캠페인을 벌여 과반 확보라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한때 괴멸적 상황을 맞았던 한나라당으로서는 살아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보수 이념과 지역주의와 박근혜 대표의 눈물 외에는 내세울 것이 전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자…,이렇게 검찰과 시민단체와 국회의 단말마(탄핵)와 단식과 촛불과 삼보일배와 눈물로 얼룩졌던 선거가 모두 끝났으니 이제 때늦은 봄 햇살이나마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불행히도 답변을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구도의 밑바닥으로부터 새로운 보·혁 구도가 둥실 떠올랐다고 본다면 앞으로의 정치전선도 그다지 편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길고긴 이념 갈등의 험난한 노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그룹이 국회에 들어왔기 때문이냐고?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어차피 열린우리당의 강경파와 보조를 맞출 가능성이 높고 잘해야 민주노총의 법정 대리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여당 내 강경파 그룹의 '잡탕론''분당론'에서부터 정국을 흔드는 헤쳐모여의 에너지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냐고? 아니다. 정치판의 이합집산 따위는 흔히 보아왔던 낡은 정치싸움에 불과하다. 오히려 빈부갈등과 수백만 신용불량자와 그보다 더 많은 잠재된 실업자와 분배 욕구들이 넘치는 진보에너지로 연결되면서 그토록 우려스런 포퓰리즘의 함정으로 국가를 밀어넣을 가능성이다. 경제가 나빠질수록 판갈이 욕구를 높이고 변화에너지를 확대 재생산하며 정치판을 달굴 것이라면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에서 비록 2백석을 얻었다 하더라도 범여권의 '변화'깃발에 질질 끌려갈 것이 너무도 뻔하다. 장외투쟁이 준비돼 있다면 더욱 그럴 터여서 한나라당도 절망이기는 마찬가지다. 나치즘의 안티테제였던 독일 진보주의의 공과를 논하지 않더라도,전두환 신군부의 안테테제였던 386의 시대착오적 세력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급박한 시대에 이념의 양측이 모두 부정(否定)의 테제를 키워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실로 두려워하며 직시하고 있다. 참여와 대중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활짝 열려 있는 터다. 경제가 나빠질수록 좌든 우든 강경그룹이 득세해왔던 것이 지난 역사였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얼마나 정치적 혼돈을 더 겪어야 할것인지. 다만 한국은 모든 것을 축약적으로 겪어내고 있다는 점에 한가닥 기대를 걸면서…. jkj@hankyung.com